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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밤 Sep 15. 2024

날아가던 신호등(1)



빨강, 초록, 노랑 목티를 입은 언니들이 선생님의 발길질에 하나 둘 셋 쓰러지던 날, 하늘은 파랑을 넘어 짙은 쪽빛이었지. 뜨문뜨문 뭉쳐있던 새하얀 구름. 눈부시게 선명한 색의 대비 아래 점멸하는 신호등처럼 언니들은 하나 둘 계단 아래로 비틀거리며 꺼져갔어. 정수리를 따갑게 하던 햇볕도 입을 바싹 말리던 운동장 모래도 느껴지지 않았어. 내 시선은 온통 신호등 언니들에게 향해 있었으니까. ‘무섭다, 무섭다’는 생각뿐이었지. 다른 건 끼어들 틈이 없었어. 내 주변에 일렬로 늘어선 다른 학생들도 그랬지.

고작 중1이었던 난 신호등 색을 입은 중3 언니들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어. 저렇게 맞을 걸 분명 알았을 텐데,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운동장 조례 시간에 교칙을 어길 생각을 하다니. 우정의 다짐이었을까. '우리 함께 맞자. 함께 맞으면서 우린 더 특별해지고 더 끈끈해지는 거야!' 이런 대화를 나눴을지도. 그날은 시련을 함께 겪는 전우애를 느끼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지. 아무렴.


퍽.

"선생님! 여기 누가 쓰러졌어요!"

한 아이가 꽥 소리를 지르자 열중쉬어 자세를 한 학생들이 움찔했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호등 언니들도 놀란 듯 고개를 들었지. 소리가 난 쪽으로 체육 선생님이 전속력으로 달려갔고, 사회 선생님도 같은 방향으로 달렸어. 한문 선생님은 달릴 자세를 잡았다가 그 자리에 섰지. 셋이나 달려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겠지. 학생 하나 쓰러진 정도로.


선생님들이 달려간 쪽을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어. 뒤통수에 눈이 달렸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 없는 뒤통수를 원망하는 게 차라리 나았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언니들처럼 맞는 것보다는.


보나 마나 쓰러진 아이는 두 선생님에게 업히거나 끌리거나 해서 운동장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 아래 벤치에 눕혀졌겠지. 선생님들은 곤란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옆에 섰겠지. 안 봐도 알 수 있었지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 쓰러진 학생은 몇 학년일까, 몇 반일까. 내가 아는 사람일까. 쓰러진 사람은 어떤 모양새를 하고 누워 있을까. 팔다리는 자연스러운 방향일까? 궁금증을 해결하다가 맞느니 상상하는 쪽이 훨씬 나았지.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교장 선생님은 일체의 흔들림이 없었어. 두 번 세 번의 메아리를 일으켜야 마땅한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굳건하게 이어졌어. 조례대 아래 쪼로로 무릎 꿇고 앉은 신호등색 언니들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교장 선생님 눈엔 쪽빛 하늘 아래 가로 세로 흐트러짐 없이 일렬로 늘어선 천여 명의 학생들이 아름다워 보이기만 했어.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어야 했지. 세상 어느 왕도 부럽지 않았지. 아무렴.


조례대 아래 쪼로로 무릎을 꿇고 앉은 언니들 옆엔 굳건한 동상처럼 곱슬머리를 한 음악 선생님이 뒷짐을 지고 섰었어.

그 선생님은 날아차기가 특기였지.


오르막을 올라 코너를 돌면 나오던 더 가파른 오르막. 3년을 다녀도 매번 숨 가쁘던 그 오르막 끝에 교문이 있었어. 교문을 지나면 제법 큰 운동장이 있었고, 운동장에서 시작되는 약 50여 개의 계단까지 올라야 비로소 학교 건물에 닿을 수 있었어. 우리 교실은 5층이었어. 교실에 도착하면 매일 산 하나를 오른 듯했지.


나는 창가인 내 자리가 너무 좋았어.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턱을 괴고 창밖을 보는 내 등 위로 하얀색 커튼이 나풀거리곤 했지. 살랑이는 바람을 얼굴로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으면 세상 근심이 다 풀리는 듯했어. 슬며시 눈을 뜨면 시선 아래로 동네가 펼쳐져 있었어. 산정상처럼 높은 교실에선 작은 골목길까지 다 보였어. 학교 운동장도 다 보였어. 교문으로 뛰어들어오는 지각생들도 보였어. 들어오는 순서대로 날아차기당하는 모습도.


음악 선생님은 만화 하니에 나오는 코뿔소 선생님을 닮았었어. 음악실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시면서 ‘아아아~’ 노래를 하시곤 했지. 날아차기하는 모습과 너무 대비되는 모습을 표현할 말을 못 찾겠어서 차라리 보지 말자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곤 했어. 언제 음악실에서 나와 우릴 향해 날아오실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야.


점잖았던 수학 선생님이 우리 반 교실 뒷문으로 들어오던 날도 기억해. 우리 반 태은이. 우리처럼 귀밑 3cm 똑단발을 한 깡마른 태은이가 선생님 손에 끌려서 교실로 들어왔지. 선생님이 손을 뿌리치듯 밀자 태은이는 책상에 부딪치며 쓰러졌어. 우린 소리도 못 지르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태은이로부터 뒷걸음질을 쳤어. 겨우 일어난 태은이 뺨을 선생님이 손으로 때렸어. 두꺼운 어른손에 실린 힘에 태은이 얼굴이 이리저리 흔들렸어. 한 대, 두 대, 세 대. 넘어진 태은이가 선생님 다리를 붙잡고 울부짖기 시작했지. "선생님!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밀려나 바닥에 내동그라지며 사그라들던 그 소리. 투닥투닥 둔탁한 소리만 울리는 교실에 우린 멈춘 시간 속 사람들처럼 숨조차 몰아쉬며 미동도 없이 섰었어.


태은이가 뭘 잘못했을까. 평소에 말수도 적고 조용히 지내는 태은이가 뭘 그리 잘못했을까.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어떤 잘못이든 저렇게 혼나는 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어. 동시에, 이 장면이 언제까지 기억될까, 이 숨 막히는 공포가 언제까지 가슴에 남을까 그게 두려워졌어.


마흔이 넘으면 사라질 줄 알았어.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의 빛과 소리와 비릿한 공기냄새가 더 선명해져. 손바닥에 사정없이 맞닿던 연약한 피부. 피부가 어그러지던 찰나. 허공을 내딛던 태은이의 시선. 초점이 날린 채 흐릿했던 우리. 그 모든 광경이 0.5배속의 느린 화면으로 천천히 재생돼. 적어도 태은이만이라도 그 기억이 흐릿해졌으면. 수학 선생님의 거친 숨소리도, 얼굴과 몸에 쏟아지던 아픔도. 모든 게 희미해졌으면.


아니겠지.

아니겠지.

그날의 기억은,

마흔이 넘었을 태은이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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