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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밤 Sep 01. 2024

까만 주름치마를 찾아서(1)


옳다고 믿었던 것이 옳은 것이 아니었음을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될 때, 깨닫기 전의 나와 깨달은 후의 나는 같은 나일까 다른 나일까.

너는 이미 알고 있겠지. 내가 내릴 답을. 과거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쥐구멍에도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던 믿음도, 그 믿음을 따라 움직였던 시간 속의 나도 모두 나였다고.


믿음은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지. ‘믿음’이란 말과 동시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 절대자보다 더 나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지배하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 사람에 대한 믿음, 사건의 인과 관계에 대한 믿음. 어떤 믿음이건 압도된 순간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게 돼. 이제는 결과에 상관없이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순간조차 사랑하게 되었어. 무의미한 순간은 없으니까.


희수는 졸업 후에, 나와 연락이 끊어진 후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갔을까. 대학 진학이 주는 의미, 아마도 있었을 남자 친구를 대하는 마음, 꿈을 향해 나아간다는 흔한 말 따위들에 대해 희수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겠지. 그 생각의 원천인 믿음에 따라 살아갔겠지.

너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 믿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감히 의문조차 가지지 못했을까. 의문을 가지는 것조차 소용없다고, 가치 없다고 생각했을까.


마지막에 해당했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


우리의 믿음들은, 그러니까 스쳐가는 모든 생각의 원천들은 시간을 두고 묵혀두고 봐야 하는데. 한창 그 속에서 허우적거릴 땐 보지 못했던 그 아래의 아래의, 어쩌면 그 위의 위의 층을 보려면 더 멀찍이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개별 사건들이 가지는 의미는 몇 년이나 지난 후에야 알게 될 때가 많아. 나는 10년이 필요해. 5년이 지나서, 7년이 지나서 드디어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10년은 지나야 진짜 알게 되더라. 특정한 사건이 주는, 인생을 움직일 정도의 묵직한 의미를. 오늘 아침 시간에 일어난 흔해 빠진 일들, 사건이라 이름 붙이기에도 평범한 것들도 언젠가 거대한 사건에 버금갈 의미를 가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매 순간 설레기도 두렵기도 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같은 사건이라도 사람마다 다른 의미로 남게 돼. 아니, 그 사건으로부터 의미를 얻을 수 있는가, 그냥 버리고 말 사건이 되는가도 사람마다 달라.


동시에 같은 일을 겪은 두 사람이 다른 부류의 사람이면 어떻게 될까. 멀리 갈 것도 없어. 엄마와 내가 그러니까. 엄마와 내가 함께 겪은 수많은 사건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었지. 기억되고, 기억되겠지.


까만 주름치마와 까만 재킷을 사러 간 날이 있었어.

내가 국민학교 졸업식을 앞둔 때였지. 겨울방학이었을 거야.

나는 어떤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졸업식엔 특별한 옷차림을 하고 가야 한다고 믿었어. 졸업식은 중요한 행사니까 정장처럼 갖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정장은 까만색이어야 하고, 치마와 재킷이어야 한다고.

엄마는 내 말을 듣고는 내가 말한 옷을 사러 함께 길을 나섰어. 집에서 가까운 옷집부터 갔는데 까만 재킷은 있었지만 고르게 주름이 잡힌 까만 치마는 없었어. 나는 만화 속 캐릭터가 입을 법한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정직한 주름치마를 떠올리고 있었거든. 집에서 조금 먼 옷집에 갔는데도 치마를 찾기 힘들었어. 치마들은 길이가 너무 길거나 색깔이 새까맣지 않거나 무늬가 있거나 했지.


엄마와 나는 하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집에서 꽤 먼 지하상가까지 갔어. 10대, 20대 젊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 거니는 지하상가엔 세련된 옷을 파는 옷집이 늘어서 있었지. 쇼윈도마다 기이한 몸매의 마네킹들이 기이한 자세로 최신 유행 옷을 입고 서 있었어. 점잖은 옷을 사기 힘들겠단 생각을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집 한 집 다 둘러봤지만 내가 찾는 치마를 찾을 수는 없었어. 차라리 천을 사서 직접 만드는 게 빠를 정도로 지나치게 정직한 모양의 치마였으니까.



-까만 주름치마를 찾아서(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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