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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밤 Aug 25. 2024

그랬으면 안 되는 선생님(2)


아무리 그래도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는 했으면 안 되는 선생님이 있었어.

아이가 11살이 되었을 때, 잠든 아이를 바라보다 그 선생님을 떠올렸어. 11살 이후 처음이었어.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니까. ‘11살’을 생각하는 계기가 생겼을 때 들이칠 때를 기다린 복병처럼 그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휘몰아치듯 몰려왔어.
제법 컸는데도 여전히 젖먹이 시절 새근새근 잠든 얼굴이 남아있는 아이를 보며 11살이 얼마나 어리고 약한지를 새삼 알았지. 이런 아이들을 1년 동안 데리고 있었던 그 선생님, 아니 그 선생 아니 그 사람. 매일같이 입고 오던 감색 외투와 이마에 불뚝 솟아있던 사마귀와 두툼하고 거칠던 피부결까지 생생하게 떠올랐어. 그렇게 생생하게는 원하지 않았는데. 희미한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일었지. 떨리는 손을 간신히 들어 잠든 아이의 얼굴에 갖다 댔어. 11살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11살이었던 우리 반 친구들에게 이제는 닿을 수 없는 늦은 사과를 했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그냥 보고만 있어서 미안하다고.

그때 우리 반이었던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그런 일을 겪고도, 상처를 이겨내고 좋은 어른이 되었을까.

희수야.
내가 11살이었을 때,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정말로, 정말로 나쁜 사람이었어. 아빠뻘 되는 선생님은 쉬는 시간마다 반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했어. 선생님이 의자에 앉아 팔을 휘저으면 우리는 선생님에게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피해 다녔지. 선생님 손에 덥석 잡힌 아이는 그대로 선생님이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혔어. 선생님은 아이의 윗옷과 바지 속에 손을 넣고 간지럼을 태웠어. 친구가 간지럼에 넘어가는 걸 보고 나머지 아이들은 재밌다고 박수를 치며 깔깔 웃었어. 나도 웃었어. 간지럼이 얼마나 간질간질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황송한지 알고 있었으니까. 몸도 마음도 간질간질한 간지럼이었어.

몇 차례의 간지럼과 몇 차례의 수업이 끝나면 공포의 종례 시간이 다가왔어. 선생님은 그날 잘못을 한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어. 대부분 남자아이들이었어. 여자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하며 친해져서 웬만하면 잘못해도 봐주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어.

이름이 불려진 애들은 하나씩 교단으로 올라가 익숙한 듯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로 이름 쓰기를 했어. 키득키득 거리는 소리가 들렸지. 엉덩이는 엉덩이 자체로 우스웠으니까.
이름을 쓰던 아이가 울면 선생님은 더 크게 야단을 쳤어. 교실에서 공놀이를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복도에서 뛰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숙제를 해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이는 울면서 계속 이름을 썼고 우리는 공포인지 우스움인지 모를 묘한 감정을 느끼며 앞을 주시했어.

그 거울, 교실 앞문에 달려있던 그 거울은 꿈에서도 자주 나와. 엉덩이로 이름을 쓰던 친구의 옆얼굴을 비춰주던 그 거울. 보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시선이 가던, 그 자리에 있었으면 안 되던 그 거울.
친구가 감추고 싶어 하는 얼굴을 굳이 내게 보여주던 그 거울이, 그 거울의 짙은 갈색 테두리가 꿈에서도 보여. 테두리 속 울고 있던 친구의 얼굴이, 그 거울을 곁눈질하던 내가 보여.

공포의 단죄 시간. 종례 시간이 끝나면 아이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교실 밖으로 쏟아져 나갔어. 울었던 친구들의 볼에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우린 하하 호호 웃으며 실내화를 벗고 복도를 지나 현관 밖으로 나갔어. 울던 친구의 눈물이 말랐는지 관심도 가지지 않고. 그 기억이 언제쯤 불쑥 올라와 죄책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고.

그 아이들의 눈물을 30년도 훌쩍 지난 지금 떠올리게 되다니.

무서워.

교단에서 친구가 흘린 눈물을 30년이나 잊고 지냈던 내가.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는지.
내게 아이가 생긴 건 그 친구들의 아픔을 상기하기 위함일까. 11살 남자아이의 마음에 남겨졌을 상처가 얼마나 아팠을지, 생업에 바빠서 차마 관심을 갖지 못한 부모 아래서 홀로 견뎌내야 했던 아이들의 외로움이 얼마나 컸을지. 감히 선생님이 잘못했다고는 생각조차 못했겠지. 자기가 나빠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겠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슬펐을까.

그때의 친구들에게 지금이라도 사죄하고 싶어.
미안해, 미안해. 몰라줘서 너무 미안해.
무엇보다, 혼자 둬서 너무 미안해.
주변에 알렸어야 했는데. 우리 엄마에게라도 말했어야 했는데. 나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어. 술래잡기하다 선생님 손에 잡힌 친구를 부러워할 정도로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나도 철없는 어린애였으니까.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지. 우린 단지 선생님을 너무 좋아했을 뿐이고, 부모님께 혼나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잘못한 사람은 그 선생님이었어.
선생님은 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어.

희수야.
가슴이 너무 아파.
우리는 우리를 아껴줬던 선생님만 기억하자.
나빴던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잘못한 행동을 했던 만큼 다른 곳에서 다른 시간 속에서도 그렇게 살았을 거야. 그리고 결국 벌을 받았을 거야. 어떤 행태로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를 아껴줬던 선생님만 기억하자.

고3 담임 선생님이 우리 손에 쥐어준 초콜릿의 달콤한 향을, 석양이 비친 칠판을 수놓았던 아름다운 함수 그래프를, 물구나무에 실패한 학생을 위해 매트를 고쳐 깔던 체육 선생님의 땀방울을 기억하면 되는 거야.

오랜만에 고3 때 선생님께 연락을 드려봐야겠어.
희수 이야기를 하면 놀라실까.
아니, 그냥 하지 않을래.
선생님의 기억 속 우리가 여전히 싱그러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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