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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밤 Aug 18. 2024

그랬으면 안 되는 선생님(1)


기억나니, 희수야.

우리 고등학교 선생님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우리 담임 선생님이지. 그 당시에 40대 후반이셨으니 지금은 퇴직하셨겠다. 잘 지내고 계시겠지.


우리 선생님은 내가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쳐를 그려도 겉으로만 화를 내는 척하셨지 날 전혀 미워하지 않으셨어. 철없는 낙서가 공부에 찌든 내게 좋은 쉼터가 되었다고 흐뭇해하셨을지도 몰라. 아마 그랬을 거야. 내가 아는 선생님은.


그러고 보면 우린 고3 시절에 참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났던 것 같아. 국사 수업 중에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침략당했던 이야기를 하시다가 버럭버럭 화를 내기도 하셨지만 덕분에 수업 내용이 더 귀에 쏙쏙 들어왔지. 눈을 지그시 뜨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은 눈앞에 펼쳐진 역사의 한 장면을 목격하고 계시는 듯했어. 선생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눈앞에도 그 장면들이 비치면 나긋한 교실은 열정적인 영화관이 되었어.


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마음씨는 얼마나 부드러우셨는지. 수능 전 날, 반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시던 초콜릿과 손 편지가 기억나지? 선생님이 그런 걸 준비하실 줄 꿈에도 몰랐잖아.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날에 받아 든 초콜릿과 편지는 남들 앞에서 우는 걸 싫어하는 날 무장해제시켰어. 초콜릿 포장을 차마 열지 못하고 몇 번이나 손으로 쓰다듬었지. 수능날의 혹한을 예고하는 때 이른 추위에 오그라든 손에 담기던 온기와 위로.  어떻게 울지 않고 버티겠어.


응시원서 아랫부분을 잘라낸 길쭉한 수험표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며 각자의 시험장으로 출발하던 그때, 교실 앞문에 서서 우리 반 애들 어깨를 하나하나 토닥여주시 선생님. 무시무시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온화한 미소만 만면에 띤 선생님을 보고 또 왈칵 울고 말았어. 내가 울기만 하면 당황하시던 분이라 그날도 어쩔 줄 몰라하시며 어허, 이 녀석은 또 왜 우냐며 안아서 토닥여주셨지.


수능을 치고, 졸업을 하고 우린 뿔뿔이 흩어졌어. 희수와도 그즈음 연락이 끊겼던 것 같아. 희수도 나도 각자의 시간을 잘 보내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굳이 너에게 연락하지 않아도 네가 어디선가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 희수도 대학에 들어갔었지. 나도 내가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희망에 따라 선생님이 되는 곳으로 진학했었고.


대학생이 된 뒤에도 몇 년 간 스승의 날에 선생님을 찾아갔어. 나는 선생님을 뵙고 싶었지만 혼자서 선뜻 뵈러 가기는 부끄러워서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갔지. 다른 학교로 전근 가셨을 땐 낯선 교무실에서 낯선 학생들과 지내시는 모습에 괜히 질투도 났었어. 


선생님들을 떠올리다 보니 고3 때 수학 선생님도 기억나. 빼빼 마르고 체구도 작고 얼굴도 손바닥만 하셨지만 목소리는 얼마나 카랑카랑하셨는지. 해가 산 너머로 기울던 8교시의 나른한 교실을 선생님의 목소리가 가득 채웠지. 선생님이 색색깔 분필로 그리시던 함수 그래프들은 예술 작품 같았어. 기존 수식에 절댓값을 붙이시곤 축을 기준으로 그래프를 꺾어 그리실 땐 전율이 흘렀어. 발돋움한 선생님의 손끝에서 완성되던 함수 그래프. 그에 매료됐던 난 혼자서 수학문제를 풀 때도 그래프를 정성 들여 그렸어. 축들과 그래프 사이를 빗금으로 색칠하면 마치 내가 수학 선생님이 된 것 같았어.

의심과 방황 투성이인 세상에서 망설임 하나 없이 선의 방향을 알려주는 게 수식이었어. 무심히 따라가기만 해도 된다는 게 수식의 매력이었고, 시각화하는 것만으로도 유려한 선이 탄생했기에 나는 수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함수가 제일 좋았어. 물론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 근본적인 계기는 수학 선생님의 열정이었지. 그분의 작은 손 끝에서 탄생하던 힘찬 선들 덕분이지.


아직도 눈에 선한 선생님들이 많지만, 몇 분만 더 떠올려볼까. 서태지를 좋아하던 내게 오늘도 서태지 노랠 들었냐며 괜히 농담을 던지던 선생님도 있었고, 전교생 모두가 물구나무서기를 할 수 있게 하겠다는 목표로 끝까지 마지막 학생 하나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체육 선생님도 계셨어. 잠시였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은 한국지리 전공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열정적인 수업으로 전교생을 한국지리 마니아가 되게 만든 선생님도 계셨지.


이런 분들과 결이 다른 분들도 떠올라. 싸늘한 냉기와 무심함이 느껴지던 분들.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보이던 그들과 우리들의 거리.

개구리밥 같은 식물이 지저분하게 인쇄되었던 문제집을 샀던 날. 우리끼리 수군거렸지.

“국어 선생님이 이 출판사에서 돈 받았나 보다.”

학생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본인조차 지루한 듯 일정한 톤의 목소리로 한 시간 동안 읊조리고 나가시던 국어 선생님. 선생님이 사라고 한 문제집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출판사의 것이었고 문제 오류도 많았고 인쇄 상태도 조악했어. 그 문제집을 펼칠 때마다 선생님의 잘못에 동참하는 것 같았지. 선생님이 정말 돈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더 좋은 책들이 넘쳐나는데도 그런 책으로 공부를 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긴 했어.


선생님이 그랬으면 안 되는 건데.


희수야.

내가 이렇게 많은 선생님들을 떠올린 건 한 사람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었어. 절대로 그랬으면 안 되는 선생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 사람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좋았던 선생님들을 떠올리고 싶었어.

일종의 면역주사 같은 거라고 할까.



-그랬으면 안 되는 선생님(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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