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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밤 Aug 04. 2024

혼나기 싫어요(1)


‘자라는 모습’


하교한 아이가 식탁 위에 올려놓은 종이 '자라는 모습'이란 말이 적혀 있었어. 학기마다 한 번씩 받아오는 성적표 같은 거야. 우리가 어린 시절 받았던 통지표 같은.

국어, 수학, 영어 과목명 옆에 적힌 '열심히 했어요'라는 말은 열심히 해서 잘했다는 걸까, 열심히 해야 할 정도로 부족했다는 걸까. 일부러 쉽게 알 수 없게 한 것 같아. 어느 쪽이든 기분 나쁘지 않은 애매함이 오히려 고마워. 열심히 했다는 건 어쨌거나 칭찬받을 일이니까.

당황하고 있을 부모들을 위한 안내가 표 상단에 있네.
'교과별 평가 결과는 열심히 했어요, 좀 더 노력해요 두 단계로 구별됩니다.'
잘했다는 거구나 싶어 안도감이 들었지. 아이가 부족하다면 곤란하니까. 내 마음이 곤란하니까. 아이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발표를 적극적으로 합니다. 봉사하는 마음이 있고 친구를 잘 돕습니다. 많이 칭찬해 주세요.'
표 아래에 선생님이 직접 작성한 듯한 행동 발달 사항을 몇 번이고 읽었어.


칭찬해 주세요, 많이 칭찬해 주세요.


선생님이 칭찬하라고 했으니 더 듬뿍 칭찬해줘야겠다 싶었지. 이미 사랑스러운 아이지만.

한편으론 덜컥 겁도 났어. 더 사랑한다고 더 칭찬한다고 하면 아이가 교만해지지 않을까.

아니, 아니야.

아이는 내가 충분하다고 느끼는 만큼보다 더 많이 칭찬해 줘야 해. 부모는 칭찬에 인색하기 쉽거든.

어릴 적 우리가 받았던 통지표 기억나니. 공책 만한 크기의 종이가 반으로 접혀 있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쪽 눈만큼만 열어본 통지표엔 과목마다 '수'가 적혀 있었어. 일렬로 늘어선 '수'들이 나를 칭찬해주고 있었지. 예의 바르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랑도 잘 지낸다고. 선생님이 정자로 곱게 쓴 행동 발달 사항은 결코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 줬어. 나는 엄마 아빠가 써 줄 <가정에서> 란에도 분명 칭찬하는 말이 적히리라 믿었어. 엄마가 일하는 동안 동생을 잘 돌보고, 숙제잊지 않고 잘했으니까.

저녁에 퇴근해 온 아빠에게 통지표를 내밀자 아빠는  ' 수'를 받느냐며 기뻐하셨어. 내 ' 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지. 선생님이 꼭꼭 눌러써주신 말까지 큰소리로 읽은 아빠는 허허 웃었어.

"펜 가져와라."

사각사각 정성스레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아빠의 등만 봐도 알 것 같았어. 내 통지표는 칭찬으로 가득 차는구나, 나는 참 훌륭한 아이구나. 스스로가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자, 다 썼다. 선생님 갖다 드려라."
부끄러워서 아빠 앞에서는 못 읽고 가족들이 없을 때 몰래 열어봤어. 아빠가 날 어떻게 칭찬했을까. 두근두근.

'동생을 잘 돌봅니다. 하지만 동생과 싸울 때가 있고, 주변 정리를 잘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따끔하게 혼내주세요.'

동생이 내 숙제 위에 붉은 색연필로 죽죽 낙서를 하던 게 떠올랐어. 엉엉 우는 나를 본 위층 아주머니가 볼펜을 지울 수 있는 지우개를 아들 책상에서 봤다며 계단을 뛰어오르던 장면도, 사포처럼 거친 고무 덩어리로 내 공책을 문지르던 장면도, 붉은 색연필이 지워지다 못해 종이에 구멍이 나서 아연실색하던 아주머니와 내 얼굴도.

그때 동생 머리를 쥐어박지 말았어야 했어.

무엇 때문이었는지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아도 엄마에게 자주 혼이 난 건 맞으니 앞으로 잘해야 되겠지. 칭찬만 적히는 날이 올 때까지. 나는 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어.

마지막 줄의 '따끔하게 혼내주세요'가 어떤 매보다 더 아팠어. 통지표를 다시 선생님께 내야 하는 날의 바로 전날, 엄마에게  뭔가로 혼이 났고 맞았던 것 같기도 해. 시무룩해진 마음으로 통지표를 선생님께 건네었지.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짝과 금세 하하 호호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날이었어. 어쩌면 평범한 날일 수도 있었지.

"이소영. 앞으로 나와라."

담임선생님이 교단으로 나를 불러 세웠어. 함께 놀던 친구들의 눈도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 동그래졌어.

"너, 엄마 말 안 듣는다고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복도로 나가서 칠판지우개털이 위로 올라가라."

복도를 좌우로 나누는 노란선을 물고 정가운데 놓여 있던 칠판지우개털이. 칠판지우개를 꼭 쥔 손을 사각형 나무 상자에 뚫린 구멍에 넣고 탈탈탈 털면 지우개에 묻은 분필 가루가 통 아래에 모이던, 지우개를 터는 용도가 다였던 그 물건. 허리춤까지 오는 그 물건 위로 열 살인 나는 한 걸음에 올라갈 수도 없었어. 한 다리를 겨우 걸치고 남은 다리까지 올리기 위해 발돋움질을 하다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했어. 차라리 그때 고꾸라지는 게 나았을까.


지우개털이에서 내려다보는 복도는 또 다른 세상 같았어. 아이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지.

"무슨 일이야, 쟤 왜 올라갔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 교실에서 선생님이 나오자 아이들의 시선이 선생님에게 쏠렸어.
“이 아이는 엄마 말을 잘 듣지 않은 아이다. 이소영, 너는 한 시간 동안 거기에 서 있어라.”
아이들의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눈동자들이 내게 쏠렸어.


나는 이 모든 상황이 텔레비전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어. 아이들의 정수리가 다 보이는 이 높이가, 아이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어.
“쟤 왜 올라갔대?”
“엄마 말을 안 들어서 그랬대.”


나는 그렇게 엄마 말을 잘 안 듣는 아이로 한 시간 동안 서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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