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의 마지막 날.
선생님은 허리에 손을 얹고 후후 숨을 쉬며 교단에 섰어.
“오늘이 2학년의 마지막날입니다. 통지표를 나눠줄 테니 받아 가세요. 1번, 2번… “
48번 이소영은 통지표를 받자마자 반으로 접힌 종이를 살짝 펼쳐보았어. 일렬로 늘어선 ‘수’ 글자가 보였지. 1학년 때 이어 올수를 받아서 너무 기뻤어. 너무 기뻐하면 친구들이 싫어할까봐 자꾸 올라가는 입가를 추슬러봤지만 얼른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
“지금부터 표창장을 수여하겠습니다. 표창장은 한 해동안 모범을 보인 학생에게 주는 상입니다.”
이소영은 눈을 반짝이며 선생님을 바라봤어. 오늘은 상장까지 받는구나 했지. 올수가 적힌 통지표와 상장까지 들고 집에 갈 생각을 하니 온몸이 간질간질거렸어.
“정은혜, 앞으로 나오세요.”
은혜가 의자를 밀며 일어섰고, 때마침 교실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은혜의 긴 머리칼과 정수리에 얹어진 리본핀에 빛을 더했어. 은혜는 환하게 웃었어. 기쁜지 웃었어. 선생님을 도운 적이 없는 은혜가 웃고 있었어.
‘왜?’
이소영은 웃고 있는 은혜를 이해할 수 없었어.
‘은혜가 왜 웃고 있지? 한 갈래로 질끈 묶은 내 머리와 다르게 하늘하늘 어깨에 내려앉은 머리카락 감촉이 좋아서? 몇 개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매일 바뀌는 리본핀이 맘에 들어서? 남동생에 물려주기 좋은 바지만 입는 나와 달리 치맛단이 바람에 흩날리는 원피스가 예뻐서?’
떨군 시선에 비친 돌청바지가 더 못생겨 보였어. 빨아도 빨아도 고집스레 색이 빠지지 않는 청바지. 바지를 원망하듯 손끝으로 꼬집다가 고갤 들고 담임선생님의 부른 배로 시선을 옮겼어. 불룩한 배 위로 고루 퍼진 임부복의 무늬 하나하나가 이소영을 빤히 바라보는 것 같았어. 무늬들은 선생님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무심한 듯 경쾌하게 묻고 있었어.. 뭘 기대했냐고.
이소영은 오랫동안 무늬들을 바라봤어.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옷의 촉감까지 느껴질 정도로.
‘나쁘다. 선생님 나쁘다.’
이소영은 고개를 떨구며 생각했어.
알고는 있었어. 은혜의 엄마가 학교에 자주 다녀갔다는 걸. 올 때마다 뭔가를 사서 왔다는 것도. 아이들도 다 알고 있었어. 알고만 있었던 그 사실이 은혜 손으로 전해지는 표창장을 보자마자 떠오른 것은, 두 일이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했지.
이소영이 어른이 되는 길목엔 2학년 때 담임선생님 같은 사람이 종종 나타났어. 마음을 다해 한 일이 누군가의 부와 인기로 어그러질 때 나는 왜 이런 돈 없는 집에서 태어났나, 나는 왜 세련되지 못한 부모 밑에서 자랐나 생각했어. 부모탓 세상 탓으로 옮겨지는 생각의 속도는 빛처럼 빨라서, 아니 빛보다 빨라서 스스로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였지. 스스로 만든 자책과 자학의 늪은 내가 만들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이상 빠져나올 수 없어.
나를 가장 잘 아는 내가 어떤 작은 희망도 정교하고 철저한 논리로 차단시켜 버리니까.
다행히도 아홉 살의 이소영은 생각했었어. 우리 엄마는 잘못한 게 없다고. 가장 나쁜 건 선생님이라고.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누군가의 엄마가 될 사람이 저러면 안 된다고.
기특한 이소영은 자라면서 질문을 바꿀 필요를 느꼈어. 잘못된 질문은 잘못된 답을 낳으니까. ‘왜’냐고 묻지 않고. ‘어떻게’를 고민해야겠다 했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희수야.
나는,
더 이상 내 것이어야 했다고 믿어온 표창장들을 떠올리지 않을 거야. 지나간 표창장들은 이미 내 것이 아니야. 내가 받아야 할 표창장은 내가 써내려 갈 거야. 내가 나를 제일 잘 아니까.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내가 무엇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내가 만든 늪을 내가 없애고, 나를 이끌어줄 손을 내가 내밀 거야.
희수야.
네가 받아 마땅할 표창장에도 얼마나 많은 말들이 쓰일 수 있었을까. 이미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마치고 돌아섰을 너를 다시 불러봐. 너는 내 소중한 친구니까 특별히 나 자신보다 먼저 너에게 표창장을 주고 싶어서.
권희수.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습니다. 자신의 빛을 잃지 않으려 했기에 정해진 규율에 맞춰 살아가는 것만이 옳다고 생각한 고지식했던 친구에게 새 숨을 불어넣었고, 당신이 지나간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삶을 칭찬하며, 이 표창장을 수여합니다.
이 표창장이 너에게 꼭 닿기를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