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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밤 Jul 21. 2024

표창장의 주인(1)


아이가 학교에서 표창장을 받아왔어. 책을 많이 읽는 학생에게 주는 상이라는데 평소에 책 읽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해서 어떻게 받았냐 하니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려서 받았대. 학교에서 상을 주는 의도를 알겠더라. 학생들이 도서관에 자주 오게끔 격려하는 차원에서 주는 거겠지.


‘상을 받은 김에 진짜로 책을 많이 읽어보는 건 어떨까?’

이 말을 불쑥 내뱉고 싶었지만, 엄마 욕심이 들어간 말은 가슴 깊이 꼭꼭 묻어두고 아이를  안아주기만 했어. 선생님께서 표창장을 주시는 의미를 알겠으니까. 상이란 그런 거니까. 아이가 잘한 걸 칭찬해 주고 더 잘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돕는 게 상이니까.


나도 상이라면 남에게 지지 않을 만큼 많이 받았었어.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타고난 아이는 공부든 뭐든 잘할 수밖에 없으니. 약간의 영특함만 뒷받침되면 어린 시절엔 꽤 잘 나갈 수 있지. 내게도 영특함이 약간 있었던 것 같아. 초등 시절 받은 상만 모아놓은 앨범이 있었는데 지금도 가지고 있는 그  앨범엔 개근상, 임명장, 표창장부터 온갖 경시대회에서 받은 상들이 꽂혀 있어. 상을 받았던 모든 순간이 다 기억나지는 않아도 선생님이 호명해서 앞으로 나갔을 때의 설렘은 기억나. 나는 정말로 약간만 영특했기 때문에 상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했어야 했어. 그 노력을 인정해 주고 칭찬까지 해주니 그만한 보상이 없었지.


이 많은 상들을 뒤로 물리는 상이 하나 있었어. 꼭 있어야 했던, 하지만 결국 없었던. 그 상의 부재는 결국 빈 페이지로 남겨진 앨범의 일부보다 더 크게 더 깊게 내 마음속에 부재로 남아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국민학교 2학년 마지막 날. 표창장을 손에 든 선생님이 당연히 불러야 할 내 이름 대신에 내 짝의 이름을 불렀던 그 순간, 얼굴을 쓸어내리던 서늘했던 감정과 내 눈을 아마도 아니 분명히 피했을 담임 선생님의 시선까지, 선명하게.


어른이 된 나는 이제 다 알지. 담임 선생님에게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아이의 상장을 정리해 넣는 내 눈앞에 한 편의 드라마처럼 2학년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가 전지적 시점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어.


1989년 3월 봄.

2학년 4반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현화 선생님은 교탁 중앙에 서서 아이들에게 자기소개를 시작했어. 백 개 가까이 되는 넘는 까만 눈동자들이 선생님을 향하는 동안 선생님은 아이들을 쭉 훑어보며 생각했지. 어디 있더라. 아, 저기 있구나. 작년 1학년 담당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영특하다는 아이가. 이제 곧 몸이 무거위질 나를 도와줄 아이가. 이소영이라는 아이가.


아홉 살 이소영은 구름 위에 앉은 듯 마음이 몽실몽실 떠올랐어. 무서웠던 1학년 선생님과 달리 상냥하게 웃는 선생님이 눈앞에 서 있는 게 너무 좋았거든. 예쁘고 다정한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이 된 것만 해도 좋은데 그 선생님이 이름을 불러주니 이게 꿈인가 싶었어. 선생님이 손에 종이와 펜을 쥐어주며 5학년 교실마다 들어가 선생님들의 확인을 받아오라고 할 때는 날개를 단 듯 날아갈 것 같았어.

선생님이 나를 선택했구나, 나는 선생님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구나, 했지.

벅찬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이소영이 교실 뒷문을 열고 나가자, 곧 수업 시작종이 울렸고 선생님은 교실 밖으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수업을 시작했어.


이소영은 손에 든 종이와 펜이 그렇게나 자랑스러울 수 없었어. 2학년이 5학년 복도를 당당하게 걸을 수 있었으니까. 언니 오빠들의 위엄에 압도될 때마다 두 손으로 펜과 종이를 감쌌지.

수업 시작종이 울리자 교실들의 문이 닫히고, 복도가 한순간 고요해졌어. 온 세상이 입을 다문 듯한 순간, 혼자 발걸음을 옮겼어. 5학년 1반 교실 앞문에 선 이소영은 바로 문을 열지 못하고 잠시 심호흡을 했어. 문 밖으로 스며 나오는 선생님의 목소리, 저 목소리가 끊길 때 쏟아질 시선을 받기 위해선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거든.

“후...”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예상대로 선생님의 목소리가 끊기고 앉은키가 한참 큰 언니 오빠들이 일제히 이소영을 바라봤어.

“무슨 일이니?”

“담임 선생님께서 사인을 받아오라고 하셨어요.”

“이리 줘 봐.”

종이에 적힌 글씨를 잠시 읽은 선생님이 5학년 1반 칸에 사인을 하셨어. 사각사각 펜을 놀리는 짧은 순간이 이소영에겐 너무 길게 느껴졌어. 시선들에 몸이 납작해지는 것 같았어.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자신은 임금님의 명령을 전하는 사신처럼 자랑스러운 담임 선생님의 심부름꾼이었으니까.


5학년 10반까지, 열 번의 시선을 받은 이소영은 약간 얼이 빠진 얼굴로 계단을 내려와 2학년 복도로 들어섰어. 이번 심부름이 몇 번째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아서 앞으로 어떡하나 걱정이 됐지. 6학년 교실에 갈 때보다는 나았지만 모두가 자리에 앉았을 때 홀로 돌아다니는 자신이 도둑고양이 같고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어.


2학년 4반 교실 문을 열고 선생님께 사인받은 종이와 펜을 드리고 자리에 앉고 나서야, 익숙한 분홍색 필통과 연필과 지우개와 ‘이소영’ 이름 세 글자가 적힌 교과서를 보고 나서야 몸에 잔뜩 준 힘을 풀 수 있었어. 2학년 4반 48번 이소영이 될 수 있었어. 비로소 학교의 정상적인 구성원이 될 수 있었어. 자리에 앉으면 이내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친구들과 떠들고 웃다 보면 무거운 마음은 어느새 날아가고 없었지.


여름방학이 지나고 만난 선생님은 눈에 띄게 배가 불룩해져 있었어. 특별하게 예쁜 선생님의 배가 특별하게 불러오니 선생님의 존재는 이소영에게 더 특별해졌어. 선생님을 돕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지. 이제는 무서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선생님이 시킨 것을 열심히 하자고 이소영은 결심했어.

결심이 무색하게 무거운 마음을 2학기 내내 지고 있었지만, 선생님이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조금 더 웃으며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이현화 선생님은 생각했어.

애가 역시 듣던 대로 야무지구나. 다음에 또 시켜야겠다, 라고.



-표창장의 주인(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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