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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밤 Oct 20. 2024

나를 모르는 곳으로(2)


운동장에 늘어선 은행나무 샛노란 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시간이 지나고 앙상한 가지가 드러나던 어느 날, 손에 쥐어진 종이 한 장.

'고등학교 입학 안내문'이란 제목의 인쇄물엔 학군들과 각 학군에 속한 학교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어. 내가 속한 학군엔 역시나 익숙한 고등학교들이 있었어. 가고 싶은 학교 순위를 매겨 원서에 쓰면 뺑뺑이를 돌리는 시스템이었지만 뺑뺑이라 해도 1순위가 제일 영향력이 크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었어. 보나 마나 우리 학교 애들은 대부분 가장 가까운 D여고를 1순위로 쓸 테고, 오늘 아침 등굣길에 지나친 버스 정류장에 늘어서 있던 언니들처럼 아침마다 버스를 기다리게 되겠지. 우리 학교 교복만큼 눈에 익은 짙은 남색 교복에 붉은 넥타이를 매고 말이야. 우리 여중 애들이 마치 숙명처럼 입게 되는 그 교복, 그걸 입고 그들 중 하나가 될 미래를 상상하니 끔찍했어.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지난 3년 같은 3년을 다시 보낸다? 절대, 그것만은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어.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종이에 그려진 학군들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빠졌을 때 선생님이 말씀하셨어.

“각 학군마다 별표가 붙은 학교들이 하나 둘 정도 보이지? 그건 타 학군의 학생을 받아주는 학교라는 의미다. 다른 학군의 학교도 별표가 붙은 곳은 갈 수 있으니 가고 싶은 사람은 선생님한테 말해라.”


별표!!

막막한 까만 하늘 같은 안내문을 수놓은 뜨문뜨문한 별표. 그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어. 나를 이 수렁에서 구해줄 동아줄, 그 줄을 잡아야 했어. 나를 구해줄 학교가 어디 있나 곰곰이 살펴봤지. 집에서 너무 먼 학군은 제외하고 대중교통으로 통학이 가능한 학군이, 그래 하나 있었어. 하필 우리 지역에서 가장 좋다는 학군이었지. 실력이 쟁쟁한 아이들이 모일 게 뻔해 보였지만, 그 애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두려움보다 나답지 않게 사는 게 백 배 천 배는 더 두려웠어. 본능이 이끌었지. 나답게 살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이 담긴 본능.


엄마는 쉽게 허락해 줬어. 좋은 학군, 좋은 학교였기 때문에? 아니. 엄마는 내가 어느 고등학교에 가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어. 변변찮은 아빠의 벌이를 메꾸느라 바빴지. 내가 언제나처럼 알아서 잘할 거라고, 집에서 조금 먼 인문계 학교로 가는구나 하고, 그 정도로만 받아들이는 것 같았어.

막상 진학해 보니 내가 놓친 부분이 하나 있긴 하더라. 좋은 학군의 애들은 공부를 잘할 뿐만 아니라 잘산다는 건 생각도 못했어. 고만고만한 중학교 친구들과 달리 고등학교에서 만난 애들은 용돈 양부터 교복 위에 툭 걸치는 외투, 그 외 소소한 것에서 내가 얼마나 못 사는 지를 느끼게 해 줬어. 고등학교 3년 간 빈부격차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던 걸 정말 다행이라 생각해. 딸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어. 엄마의 무지와 무관심이 안타까운 때도 많았지만 부모의 기준으로 앞길을 정해 놓고 아이를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보단, 지금 생각하면 훨씬 나았어. 나라는 사람에 대해 가잘 잘 아는 건 나였으니까. 엄마는 본의 아니게 내가 내 선택을 선택을 밀고 나갈 수 있도록 여건 조성에 일조해 줬어.


고등학교 예비소집일 날, 담임 선생님은 내게 누런색 큰 봉투를 쥐어주셨어. 우리 학교 학생들의 건강기록부라며 전달을 부탁하셨지. 서로 데면데면한 애들 몇이서 느슨한 무리를 이루어 지하철을 타던 날, 구겨지지 않도록 봉투 양쪽을 양손에 가만히 쥐고 지하철 문에 기대고 서서 창밖을 바라봤어. 낯선 건물과 가게들이 휙휙 지나갔지. 지하철은 우리 동네를 벗어나고 있었어. 우리 중학교를 벗어나고 있었어.

내 묵은 인간관계를 벗어나고 있었어.


낯선 교문을 지나 낯선 운동장을 지나 여느 학교처럼 2층에 자리한 교무실에 들어가 봉투를 전달했어. 봉투를 받은 선생님은 내용물을 꺼내 확인하셨어.

“하나, 둘, 셋, 넷… 총 아홉 명분이구나.”

그래. 총 아홉 명 분. 겨우 아홉 명이 나와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을 한 거야. 그것도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아홉이.

700명이 넘는 신입생 중 겨우 아홉. 물이 가득한 컵에 우유 한 방울이 떨어지는 형상이 떠올랐어. 순식간에 형체를 잃고 물로 스며드는 우유 한 방울. 나는 우리 아홉이 700여 명 속에 기존의 형체를 잃고 스며들길 바랐어. 이왕이면  끝까지 서로를 잘 모르도록 아홉 모두 각각 다른 반으로 흩어지길 바랐어.

그리고 내 바람은 이루어졌지. 열세 개나 되는 반에 우린 하나씩 흩뿌려졌어.


낯선 교실에 앉아 낯선 애들과 앉아서 맞이한 1학년 첫날.

별로 웃을 일이 없어 거의 무표정으로,  마음 가는 대로 시선을 옮기며 앉아 있었어. 새로 만난 짝은 나와 인사만 나누고는 쉬는 시간마다 중학교 때 친구를 찾아 다른 반으로 가버렸어. 우리 여중이 D여고로 대거 갔듯이 여기도 주변 한 두 곳에서 한꺼번에 많이 온 것 같았어. 이미 서로 잘 아는 애들은 쉬는 시간마다 삼삼오오 모였어어. 난 책상에 앉아 음악을 듣거나 공부를 했어. 어찌 된 이유인지 반편성 배치고사에서 상위권에 들었기에 공부에 자신감도 붙었어. 이대로라면 잘 나간다는 이 학교에서 성적까지 잘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지.

이렇게 쉽게 새로 태어나도 되나, 싶을 정도였어.


등교할 때는 익숙한 버스 정류장 앞을 유유히 지나쳤어. 우리 학교는 버스가 아니라 지하철로 통학할 수 있었으니까. 짙은 남색 교복에 붉은 넥타이를 하고 늘어선 무리 앞을 자줏빛 재킷에 파란 펜던트를 하고 지나쳤어. 익숙한 얼굴들과는 인사도 나누었지. 안녕? 안녕. 하루 잘 지내. 응, 나도 잘 지낼게.


너희들이 없는 곳에서.


나를 알던 애들과 다른 길을 걷고 다른 곳에서 지내는 날이 펼쳐졌어. 학교를 선택하는 것으로 한순간에 모든 게 다 바뀌어버렸어.


살아온 시간을 돌이켜보면 어리석은 순간이 참 많았지만, 지금도 어리석음으로 헤맬 때가 많지만 언제나 간절한 순간엔 옳은 선택을 했던 것 같아. 당시엔 옳은 지도 그른지도 모른 채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마음음밖에 없었는데, 죽음을 목전에 둔 심정으로 간 길은 언제나 날 성장시켰어.

그 선택들이 옳았기 때문일까, 내 간절함이 그 선택들을 옳음으로 이끌었기 때문일까.

둘 다라고 생각해.


고등학교 입학 후 한 계절이 지난 뒤엔 친한 친구도 생기고 깔깔 웃는 날도 있었어. 달라진 건 내가 웃고 싶을 때 웃었다는 것, 그리고 같은 음악을 들을 수 있고 같은 걸 좋아할 수 있는 소수의 아이와 친해졌다는 것. 등하교는 3년 내내 혼자 했었고 덕분에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들을 수 있었어. 친구와는 좋아하는 가수나 좋아하는 만화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어. 그 대화 속엔 거짓이 없었어. 솔직한 마음을 나누는 관계는 힘이 부칠 게 없었지. 친구와 보내는 시간은 진정한 휴식이었어.


책상 위로 나른하게 뻗은 너의 두 팔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었던 건, 나로서 살아간 시간이 2년이나 누적됐기 때문이었어. 난 한눈에 알아봤어. 너의 해맑음과 그 뒤에 숨은 불안과 아픔을.


왜냐면,

너는 나랑 닮은 사람이었으니까.

나보다 더 솔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난,

너를 부러워했어

동경했어.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가닿을 수 없는 '나다움'을 네가 가진 것 같았기에.


보고 싶다.

희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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