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미지 않은 내 말이 나의 '모어'입니다.

'김애란 <바깥은 여름>'을 읽고

by 하얀밤

책 <바깥은 여름>도 얼마 전 도서관에서 얻은 책 중 한 권입니다. 앞서 읽은 <달려라, 아비>처럼 소설집이고 이야기 하나하나가 예리하고 묵직합니다.


김애란 작가의 문장을 읽고 있으면 어린 시절 깨뜨린 수은 체온계가 떠오릅니다. 14살, 중1이었던 저는 오전부터 열이 끓어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 조퇴를 했습니다. 어질어질할 정도로 몸이 아팠지만 일하는 엄마에겐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연락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텅 빈 집에 돌아와 언젠가 엄마가 넣는 걸 봤던 수은 체온계를 꺼냈습니다. 엄마가 하던 것처럼 손에 쥐고 털어내듯이 흔들었습니다. 콧 속에서 뜨끈한 바람이 나오는 걸 느끼는 순간, 몸이 약간 휘청였나 봅니다. 체온계의 끝이 책상과 부딪쳤고 수은 방울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튀었습니다. 열기로 뜨끈한 손가락 끝에서 두 개, 세 개로 부서지던 그 방울들이, 휴지 위에서 도르르 구르던 방울들이, 장력과 중력을 무시하는 듯 명랑하게 떠다니던 방울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제 마음대로 제어되지 않는 수은 방울과 씨름을 하다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일하다 급히 달려온 엄마는 방 안을 빠르게 둘러보더니 다짜고짜 제 등짝을 세게 후려쳤습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후끈한 기운과 힘없이 고꾸라지는 제 모습에 깜짝 놀란 엄마는 그제야 제가 아프다는 걸 알았습니다.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아빠에게 빨리 오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아빠가 오기까지 방구석에 앉아 분주히 방을 청소하는 엄마를 지켜봤습니다. 엄마라고 수은을 청소하는 방법을 알았을까요. 시골에서 중학교까지 겨우 나온 우리 엄마는 수은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을 겁니다. 걸레에 물을 적셔 여기저기 닦아내 보던, 지금의 내 나이였던 엄마. 일하다가 뛰어와서 수은으로 범벅된 방을 청소하던, 펄펄 열이 끓어 병원에 당장 데려가야 하는 딸까지 곁에 뒀던, 젊었던 시절의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이야기가 <바깥은 여름>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누군가의 시차'는 우리 엄마의 시차였고, 바쁜 엄마에게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집에 와서 혼자 열을 재던 저의 시차였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책을 읽고 공감하는 그 누군가의 시차일 수도 있겠지요.


날아다니듯 구르던 기억 속 수은 방울들처럼 김애란의 문장들도 책 속을, 읽는 이의 마음속을 걷잡을 수 없이 굴러다닙니다. 한 문장을 붙잡을라치면 문장 속 함축된 의미들이 수은 방울처럼 갈래갈래 부서집니다. 잡고 싶으나 잡을 수 없는, 내 것으로 하고 싶으나 내 것으로 할 수 없는 문장이 김애란의 문장입니다. 뜨거운 바깥과 다른 시차로 '차갑게'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부지런히 대신 전해 주는, 현실에 분명 존재하지만 낯선 수은 방울 같은 그녀의 글이 참 좋습니다.





김애란 작가도, 저도, 그리고 어딘가에 글을 쓰고 싶어 안달 난 누군가도 아마 이 소설집 속의 '침묵의 미래'에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침묵의 미래'는 소수언어박물관에 갇혀 전시물처럼 살아가는 소수언어 사용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모어란 호흡이고, 생각이고, 문신이라 갑자기 그걸 '안 하고 싶어 졌다'라고 해서 쉽게 지우거나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말과 헤어지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말과 잘 사귄 것도 아니었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자기 삶의 대부분을 온통 말을 그리워하는 데 썼다. 혼자 하는 말이 아닌 둘이 하는 말, 셋이 하면 더 좋고, 다섯이 나누면 훨씬 신날 말, 시끄럽고 쓸데없는 말. 유혹하고, 속이고, 농담하고, 화내고, 다독이고, 비난하고, 변명하고, 호소하는 그런 말들을...... 그는 언제고 자유롭게 나를 부리고 싶어 했다. 그리고 내 이름의 메아리와 그 메아리의 메아리가 만들어내는 오목한 자장 안에 우뚝 서고 싶어 했다. 단지 그 소박한 바람 때문에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았다. 소리를 표현하고, 맛을 그리고, 색을 분별하며 감정을 가리키는 그 풍부한 어휘들을 죽어서도 잊지 못할 거라고., 그는 죽어서도 생각했다. 그는 짐승처럼 "크허, 흐어어, 흐억" 소리밖에 내지 못했지만 순간 나는 그가 부른 이름이 내 이름이었다는 걸 알았다.

<바깥은 여름> '침묵의 미래' 中


소설 속의 '나'는 '소수 언어'를 인격화시킨 존재입니다. 모어 화자가 줄어들면서 홀로 남은 주인공을 바라보는 '나'가, 주인공이 모어를 잃어가는 과정과 영원히 모어를 잃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저는 모어를 쓰지 못해 결국 몸과 마음에 병이 나는 화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를 보았습니다. 소설 속의 '모어'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대치되어 읽혔습니다. 나를 거리낌 없이 표현하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눈치 보지 않고 말하는 행위를 잊어가는, 그리고 잊음에 익숙해져서 이러다 진짜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아 두려워하는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겉으로는 웃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맡은 바를 잘 해내는 것 같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차마 덜어내지 못할 간절함이 꿈틀거리는 우리의 마음 말입니다. 간절함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한 사람은 소설 속의 화자들처럼 몸과 마음에 병이 듭니다. 그래서 나도, 이 글에 공감하는 사람도 마음에 아픔 하나씩 가지고 있나 봅니다.


수은 방울이 구르던 내 방과, 나를 뒷좌석에 태우고 병원으로 달리던 아빠의 자동차와, 엄마의 미안함이 뒤섞인 울음 같은, 그 어떤 것이든 내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해 내고 싶습니다. 꾸미지 않고 다가갈 수 있는, 꾸미지 않은 사람들과 '모어'로 만나고 싶습니다. 도서관 구석에서 수줍게 손을 내민 <바깥은 여름>은 저에게 모어로 대화하는 기쁨을 주었습니다. 모어가 그리워질 때 즈음 다시 꺼내어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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