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소풍 날 친구들은 소풍이 끝나도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서 영화관에 갔습니다. 무슨 영화를 어디서 볼 지 이야기하는 친구들로부터 저는 한 두 발짝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그들과 저 사이에 세상에서 가장 깊은 협곡이 생긴 것 같은 거리감을 느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서 있으면 아이들은 저를 보며 물었습니다.
"너는 왜 안 가?"
"엄마가 허락을 안 해서."
"왜? 공부도 잘하는데? 우리 엄마라면 용돈도 더 팍팍 주겠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왜 못 갈까. 나는 알아서 공부도 하고, 동생들도 잘 돌보는데 왜 나는 안 되는 걸까?' 하고 제가 오히려 친구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자유와 용돈이 저에겐 한 번도 충분히 주어진 적이 없었거든요.
눈물이 배어 나오는 걸 숨기려 하늘을 올려다보면 해는 무심하게도 중천에 떠있었습니다. 소풍은 왜 이리 빨리 끝나는 건지, 밤새도록 하면 좀 좋아. 원망 섞인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꾹 참고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언제나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집안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에겐 저와, 남동생 둘과, 그리고 혹독하게 시집을 살리는 시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혼자서 운영하는 가게까지요. 어린 제 눈에도 엄마는 건드리면 안 될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터지지 않는 게 고마운 폭탄이었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즈음으로 기억납니다. 엄마에게 친구 집에 가서 한 밤 자고 싶다고 졸랐던 적이 있습니다. 반 아이들이 그렇게 하는 걸 부러워하던 중에 단짝인 친구가 자기 집에 와서 한 밤 자면서 놀자길래 대뜸 알았다고 대답을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허락하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며 조용히, 끊임없이 중얼거렸습니다.
"엄마가 허락해주는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기적이 일어나기 힘든 정도는 그날 엄마에게 맞은 등짝의 고통과 비례하는 것 같았습니다. 엄마도 처음부터 저를 때리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자꾸 졸랐기 때문입니다. 조르면서 울고 소리 질렀기 때문입니다. 왜 나만 안되냐고, 동생들 숙제까지 다 해주는 내가 왜 안되냐고.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이미 주어진 삶이 너무 버거워 어떤 가벼운 것 하나라도 지우고 싶어 했었던 것 같습니다. 한탕을 노리며 한 곳에 발을 못 붙이던 아빠에게 엄마는 기댈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에게는 고상함과 우아함 따위 남의 나라 이야기였고 오직 하루를 무사히 살아내야 하는 억척스러움밖에 없었습니다. 눈만 돌리면 투닥투닥거리는 아들 둘, 밥때만 되면 며느리의 사정이 어떻든 밥 차려주기만을 기다리던 시어머니의 눈 부라림 틈에서 착한 첫째 딸의 요구 사항은 굳이 들어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지요. 저는 나쁜 아이가 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엄마가 미우면서도 불쌍했거든요.
그렇게 저는 '요구하지 않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요구하지 않는 대신 '엄마에게 줄 것을 찾는' 기특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좋은 성적이 적힌 성적표와 상장이 특히 엄마를 기쁘게 하는 걸 알고 이거다 싶었습니다. 공부를 잘하면 엄마도 웃고, 나도 기분이 좋고, 친구들도 선생님도 저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공부는 시간만 들이면 되었고, 따로 돈도 들지 않았습니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만 가득했던 아빠에게조차 잘 보이고 싶어 크리스마스 선물로 '명심보감 책'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는 레고가 갖고 싶었지만요.
착한 아이로, 부모가 자랑하고 싶은 아이로 자란 저는 어른이 되어서도 착해 보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마 반듯하고 정직해 보이는 사람일 겁니다.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온 방식이 있으니 그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쪽으로 과하게 발달되었다고 할까요.
이런 저에게 부모로서 살아가는 것은 저를 부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알아서 잘했던 저와 달리 제 아이들은 저만큼 알아서 잘하지 않습니다. 매달 일정하게 주는 용돈을 모아서는 어이없을 정도로 조잡한 것을 비싼 값에 사 오고, 엄마를 졸라서 해가 지고 난 이후에도 친구들과 놀다가 들어옵니다. 저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초등 고학년의 수준에서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고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관대하게 대하는 제 모습이 예전의 우리 엄마와 다름을 느끼면서 세대가 이렇게 바뀌는 건가 생각도 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이 친구 집에서 자고 오겠다는 이야기를 했을 땐 지구 온난화로 녹아내리던 빙하가 툭, 하고 부서져 내리는 것처럼 제 마음 한 구석이 툭,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통보하듯 허락을 구하는 딸을 마주하니 어릴 적 엄마에게 맞았던 등짝의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그때의 저와 딸은 비슷한 나이입니다. 땀에 젖을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울던 제 모습이 희미해지며 그 자리를 딸의 얼굴이 채웁니다. 엄마를 빤히 올려다보는 새까만 두 눈을 보니 제가 울 것만 같습니다.
나도 저런 눈으로 엄마를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알았어."
"엄마, 고마워!!"
딸이 저를 덥석 안습니다. 그 이후로 파자마 파티 준비는 일사천리였습니다. 편의점에 같이 가서 먹을 걸 사고, 팬시점에 가서 웃긴 선글라스와 머리에 덧붙이는 반짝이 가발도 샀습니다. 팬시점 진열대 사이를 요리조리 다니는 딸의 뒷모습이 과거의 저를 위로해 줍니다. 그래, 재미있게 놀다 와라. 신나게. 오래 기억에 남을 만큼. 엄마가 못 놀았던 대신 네가 실컷.
딸을 친구 집에 데려다주고 와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딸의 파자마 파티를 준비하며 느꼈던 알 수 없는 서글픔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글을 쓰다 보니 무엇인지 알 것 같네요.
언젠가 딸이 저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엄마, 엄마는 과거로 돌아가서 초등학교 4학년인 엄마를 만나면 뭐라고 해주고 싶어?"
제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딸이 오히려 당황했습니다. 저도 쉽게 대답해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자꾸 웅크리고 우는 아이 형상이 떠오르고 말문이 막혀 당혹스러웠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며 가만히 기다리는 딸에게 대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