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부쩍 배가 아프다 합니다. 잘 먹지도 못하고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어합니다. 배를 만져주고 소화제도 먹여 보지만 복통이 반복되고 식욕도 없다고 부쩍 걱정을 합니다. 수시로 엄마를 부르니 혹시 아이 건강에 문제가 생겼나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아이의 몸에 아무 문제도 없음을 저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딸이 배가 아프다고 한 시기와 교우관계에서 문제가 생긴 시기가 엇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딸과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습니다.
아프다는 배를 손으로 살살 쓸어주니 좋은지 가만히 있습니다. 10살이 넘어가며 많이 큰 줄 알았는데 아직도 배가 제 손바닥보다 조금 더 넓습니다. 기저귀를 채우던 아기 때가 생각나 잠시 감상에 젖어 있는데 딸이 입을 엽니다.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엄마.. 내일 학교 가서 수업 시간에 배가 아프면 어쩌지?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그럼 화장실에 가면 되지."
"응..."
"화장실은 담임 선생님이 허락하시면 언제든지 갈 수 있어."
"응..."
딸의 고개가 더 힘없이 수그러듭니다.
"혹시 P랑 그 주변 아이들이 화장실 가는 걸 보고 놀릴 것 같아서 걱정되서 그래?"
"응..."
역시나 P와의 문제가 원인이었습니다.
P는 같은 반이 되며 친해진 아이입니다. 딸과 P, 그리고 P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두 명이 더해진 네 명은 학년 초부터 무리를 이루어 놀았습니다. 넷은 함께 하교하고 군것질도 하고 연예인 이야기도 하며 여느 여자 아이들 무리처럼 지냈습니다. 딸이 단톡방을 만든 뒤로는잠들기 전까지 거기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 거렸죠. 초등 입학을 위해 낯선 동네로 이사와 친구가 없었던 딸이 안정을 찾은 것 같은 모습에 저도 흐뭇했습니다.
문제는 P가 새로운 단톡방을 만들면서 시작됐습니다. 딸이 넷 중 자연스레 리더 역할을 맡게 된 것이 못마땅했던 P는 딸이 만든 단톡방 말고 자기가 만든 방에서만 대화를 하자고 했고, 딸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싸우기 싫은 마음에 그 말에 따랐습니다. 딸은 따뜻했다 차갑다를 반복하는 P와의 관계에 지치고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들어 P가 만든 단톡방에서 나와버렸고요. 그 날 이후로 P와 무리를 이룬 아이들은 딸을 못 본 채하고 무시했습니다. 따돌림을 당한 것이지요.
저는 이 모든 사실을 일이 벌어지고 몇 주 뒤에나 알았습니다. 딸이 안기며울던 날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엄마, 너무 힘들어.."
자초지종을 들은 저는, 네 그렇습니다. 솔직히 너무 화가 났습니다. 내 아이를 아프게 한 P가 원망스러워 당장이라도 P와 부모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섣부른 대응이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성의 목소리가 저를 붙잡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어깨를 들썩이는 아이를 안고 있는 제 마음 한 켠도 함께 무너져 내렸습니다.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결국 열쇠는 딸에게 있다" 였습니다. 아이는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웃고 울고 설레고 아파할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걸어야 할 쉽지 않은 그 길에 첫 발을 내딛은 딸이 대견스러우면서도 아이가 찬바람이 부는 대지 위에 외투없이 홀로 서 있는 것 같아 안쓰러웠습니다. 제가 입은 외투를 얼른 벗어 딸에게 입혀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맞지 않는 옷은 곧 한계를 드러내겠지요.
딸은 이제부터 자신만의 외투를 지어 입어야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마음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시계는 어느새 3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딸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에겐 자신의 매력을 알아봐주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필요해. 누구나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거든. 우리 딸은 그런 사람이 필요한거야. P는 인정하기 보다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걸 선택한 것 같아. 너의 매력을 알아봐주고, 너 또한 상대의 매력을 찾아 서로 순수하게 지지하는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을 너도 언젠가 만나게 될 거야. 그런 사람이 빨리 나타나면 좋겠지만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너의 곁에 왔을 때 그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네가 가져야 한다는 거야. 그 눈을 가지기 위해선 네 스스로 너를 사랑해져야 해. 엄마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너 자신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즐기고, 취미가 실력이 되도록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면 어느새 너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곁에 와 있을 거야."
"엄마도 엄마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었어?"
"그럼, 지금도 있지."
"그 사람이 뭐라하면 엄마는 어떻게 해?"
"기분은 나쁘지. 그렇지만 그 사람이 엄마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잊으려고 노력해."
"잘 안 잊혀지잖아."
"맞아.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자고 하면 코끼리가 생각나는 건 당연하니까. 그럴 땐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일을 해. 사람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기 때문에 뭔가가 신경쓰일 땐 일부러 다른 일을 해야 해. 그러면 자연스레 싫은 일이 마음에서 차지하는 정도가 줄어들지."
딸의 표정이 한결 밝아져 있습니다. 배가 어떠냐고 물어보니 괜찮아졌다 합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저 배가 완전히 나으려면 시간이 걸릴 걸 알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딸의 얼굴과 머리카락과 배를 쓰다듬어 주니 강아지처럼 가만히 있다가,
"엄마, 우리 이제 자야해." 합니다.
벌써 4시 30분입니다.
앗,
좀,
큰일났네요.
수면 부족으로 둘에게 힘든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새벽은,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우주 공간같은 시간을 선물했습니다. 선물을 받아든 하루이기에 그렇게 견디기 힘들 것 같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