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을 지나오기만 해서 미안해요.

'강미 <사막을 지나는 시간>'을 읽고

by 하얀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학생 때가 좋았다고. 학생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저는 학생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

습니다. 아, 돌아가고 싶었던 때가 딱 한 번 있었습니다. 대학생 시절 새 학기를 맞이하며 두툼한 수강편람을 뒤적거릴 때입니다. 한 학기 생활의 운명이 걸린 시점이었지요. 이수하기 좋은, 바꿔 말하면 대충 수업을 듣고 대충 과제를 내도 학점을 잘 주는 교수님들의 수업을 골라 넣은 시간표를 만들기 위해 동기들과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던 때였습니다.


"일주일에 4일만 학교에 와도 되는 시간표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될 것 같은 설렘을 느끼면서 수강편람을 촤르륵 넘기는데, 선배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들었어? 그 선배... 필수 과목을 하나 이수 안 해서 졸업이 안 된대."

"진짜? 어떡해..."


불안한 눈빛을 한 동기와 같은 눈빛을 한 제 눈이 마주치고, 우리는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었습니다. 봄날 캠퍼스 한가득 필 철쭉처럼 헤벌쭉 거리던 우리 표정은 냉철한 현실을 깨닫고 순식간에 어두워졌습니다. 자유로운 것 같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스스로가 져야 하는 대학생의 현실을요.


"아, 시간표 다 짜주던 중고등학교 때가 그립다!"


누군가가, 어쩌면 제가 말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때 말고는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때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저는 스스로를 옥죄는 학교 생활을 했었습니다. 집이 부유하지도 않았고, 부모님의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스스로 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겠다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면서 동시에 올라가려 애썼습니다.


어른이 되어 떠올려보는 그때의 저는 참 안쓰럽습니다. 어떠한 어른이 되어야겠다거나, 어떤 삶을 살아야겠다 같은 생각을 할 머리도, 틈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다가오는 월례고사 시험 범위가 어디인지, 옆에 앉은 아이는 어디까지 공부를 했는지, 시험까지 남은 기간 동안 무슨 과목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는 게 생각과 사고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물론 좋아하는 가수도 있었고, 단짝도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사기 위해 단짝과 야자를 튀었다가 담임 선생님에게 걸려 혼쭐이 났던 기억도 떠오르지만, 내가 교칙을 어긴 나쁜 아이로 찍히면 어쩌나 했던 불안감도 선명히 떠오릅니다. 모든 행동이 공부와 성적으로 수렴되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번에 읽은 소설 <사막을 지나는 시간>은 그때의 저를 많이, 아주 많이 떠오르게 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창우와 민준이 모두 옛날의 저 같습니다. 주변의 시선에 끊임없이 신경 쓰고, 교사의 눈치를 보고, 적당히 욕먹지 않는 선에서 위악이나 위선을 행하는 아이들 말입니다. 이 아이들과 과거의 저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좋은 성적과 좋은 대학'.


좋은 성적과 좋은 대학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건 어른이 되면 다 압니다. 그런데도 그 믿음은 믿음 자체로 굳건하게, 오로지 믿기 위한 믿음으로 우리에게 종교처럼 작동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또 얼마나 많은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오롯한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걸까요. 어린아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동에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기 어렵습니다. 보고 들은 것이 적기에 깨달을 기회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맞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압니다. 머리가 커지면서 '어, 이게 맞는 건가?' 싶다가도 자기 힘으로 걸어본 적이 없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불안하고 어색해서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버립니다.


재희의 주먹이 강비에게 날아가려는 찰나, 담임이 문을 열었다. 창우는 재희를 급히 주저앉혔다. 에이, 뭐야.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처럼의 구경거리가 싱겁게 끝나버려 아쉬운 것이다.
그 순간 띵, 창우의 머릿속을 울리는 게 있었다. 공동체 의식 기르기? 개나 줘라 싶었다. 패드립 발표를 하던 녀석들,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법이다 싶었지만 수업은 수업일뿐이다. 민수나 강비가 독거노인과 편지를 나눌 리도 없다. 발표는 발표일뿐이다.
환호하던 담임의 표정이 떠올랐다. 사공현보다 더 순진한 건가. 창우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강미 <사막을 지나는 시간> p45


독거노인과 같은 약자를 보호하는 방법이나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 같은, 수업시간에 번지르르하게 발표했던 것들이 오직 과제용이었음을 확인하는 창우의 마음을 표현한 부분입니다. 수업 내용과 현실의 골이 크다는 것을 확인할 만큼 지적 능력이 발달되어 눈에 띄는 괴리를 확인하고도 피식, 하고 웃은 뒤 창우는 다시 공부를 합니다. 좋은 생기부를 위해서, 그에 따르는 좋은 대학 입학을 위해서요.





이쯤 되면 더 무서움이 느껴집니다. 소설 속 아이들은 2022년 대학 입학을 앞둔 현재의 고3들이고, 저는 고3을 지난 지 20년이 훌쩍 넘은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그들에게 공감을 한다는 것은 20년 전의 아픔을 20년 후의 아이들이 똑같이 겪고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그때 그랬지'하고 약간의 향수와 약간의 애틋함과 안도감을 느끼는 제가 과연 기성세대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요. 요즘 아이들은 더 정교해지는 시스템 안에서 더 촘촘한 틀에 맞춰 자신을 꾸미고 맞춰야 합니다. 자유학기제, 고교학점제 등 낯선 용어만큼 낯선 새로운 틀 안에서 네모면 네모, 세모면 세모로 몸을 구겨 넣어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민준과 창우에게 미안함을 느낍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제 아이들에게도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마음만 들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무기력감을 느낍니다. 문제집에 동그라미만 치던 학생이 크면 이렇게 되는 걸까요.


<사막을 지나는 시간>은 애써 눈 돌리고 있었던 현실을 보라고 저를 다그치는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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