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스즈메의 문단속>을 3회차 관람하는 동안
상영관 밖에서 기다리는데 대사가 다 들린다.
일본어는 나에게 익숙한 언어다.
나에게 따뜻한 언어다.
일본어는 나에게 아빠냄새다.
어릴 적 아빠차를 타면 일본어가 들렸다.
"에에가캉와 치카테츠노 에키노 스구 토나리...."
아마 이런 식의 생활 회화였던 것 같다.
아빠가 좋았던 나는 일본어도 좋았다.
아빠는 일본어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했지만
일본어를 좋아했다.
클래식 음악과 독서도 좋아했다.
아빠는 지금 말로 덕후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었다.
나는 아빠를 떠올리게 하는 일본어를 계속 좋아했다.
그러다 고 3 때, 나처럼 일본어를 좋아하는 짝을 만나
수능과 상관없는 교련 시간을 일본어 공부 시간으로 정해서
본격적으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둘이서 같이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외우고
한국어 발음을 일본어로 써서 몰래 쪽지도 주고받았다.
일본어에는 없는 'ㅓ' 발음은 일본어 같은 동글동글한 문자를 우리가 직접 창조해서 둘 만의 글자로 만들었다.
좋아하는 일본 가수의 앨범이 발매되는 날이면
모아놓았던 용돈을 들고 야자를 튀었다.
당시엔 일본 앨범이 정식 수입되지 않아서
음지에서 비싸게 주고 사야 했다.
쫄보였던 나는 선생님께 꿀밤을 맞을 걸 각오하고
마구 뛰는 심장만큼 빠르게 교문 밖을 달렸다.
그때 보이던 밤하늘의 별은 지금도 아득하고 애잔한
고등학교 시절의 한 장면으로 눈앞에 선연하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순수하게,
성의를 다해,
많이 좋아했다.
이후 친구는 일본어과로 진학했고
나는 엄마가 가라는 대학으로 갔다.
일본어와 상관없는 대학을 갔지만
나는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봤고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일본어가 줄줄 나오는
덕질한 사람은 아는 그 경지에 이르렀다.
대학 시절 즐겨보았던 <바람의 검심>은
지금 봐도 너무 재미있다.
영화로 훌륭하게 실사화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영화는 지금도 가끔씩 본다.
(잔인한 장면이 많아 아이들 없을 때 본다.)
취업을 하고 안정감을 갖게 되니
마음 편히 일본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일본어와 상관없는 일을 하면서도 공부하는 나한테서
아빠 냄새가 났다.
돈도 벌고 여유도 생겨서 일본어 학원에 등록했지만
학원은 재미가 없었다.
학원을 그만두고 독학을 해서 JLPT 2급을 땄다.
1급은 도전했다가 그만뒀다.
너무 어렵기도 했고 즐기는 수준으로는 2급이 적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돈을 모아 처음 일본에 갔던 2007년 여름.
기온이 40.9도를 찍고 뉴스에서는 100년 만의 더위라며
열사병 사망자 숫자를 줄기차게 내보내던 그때.
나는 우주선을 타고 화성에 간 사람처럼 설레어
쉬지도 않고 됴쿄 시내를 돌아다녔다.
도요타 전시장 구경을 하고 나오다가
고3 때 좋아했던 일본 가수를 만났다.
외계인을 만난 것처럼 신기했다.
달려가서 말을 걸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결혼을 하고, 쌍둥이를 낳게 되면서
약 10년 동안 나를 잊었다.
일본어를 좋아했던 소녀와
책을, 애니를, 영화를, 음악을 좋아했던 소녀는
10년 동안 겨울잠을 잤다.
깨어날 봄날이 생각보다 빨리 오지 않아서
그대로 죽는가 했는데
만 10년이 지나던 즈음부터 언 땅이 풀렸다.
10년 만에 아이들과 일본에 갔던 날,
코로나로 입국 심사가 길어지는 공항에서
종이와 QR, 어느 쪽이 빠른지 궁금해서 직원에게 물었다.
"도찌가 하야이데스까?(어느 쪽이 더 빨라요?)"
무심결에 튀어나온 일본어에 나도 놀라고
아이들도 놀랐다.
녹슨 자전거 같은 일본어는 꽤 쓸만했고
여행 기간이 길어질수록 기름칠을 새로 한 듯 잘 달렸다.
파파고는 감탄을 자아냈으나
플랫폼을 잘못 알아서 당장 타야 하는 기차를 놓칠 뻔할 땐
녹슨 자전거가 더 유용했다.
한국에 귀국하자 딸이
일본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아이와 서점에서 기초 일본어책을 샀다.
<너의 이름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좋아하는 아들은
다시 일본에 놀러 가고 싶다고 했다.
지금 아이들이 3회 차 관람 중인 <스즈메의 문단속>은
우리 아빠 냄새의 연장인 걸까.
아이들은 할아버지 냄새를 잊어가고 있지만
엄마가 다리 놓아 여전히 아이들 코를 간지럽힌다.
세리자와 차에서 흐르는 노래가 들린다.
내가 좋아했던 <그와 그녀의 사정> 엔딩곡이다.
"사가시 모노와 난데스까~(찾고 있는 건 무엇인가요)"
저 애니도 참 좋아했었는데.
여자 주인공이 나같다던 친구 말이 기억난다.
영화가 끝을 향해가는 것 같다.
조만간 아빠를 만나러 가봐야겠다.
아빠 냄새가 이 세상에서 진짜 사라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