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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미선 Dec 27. 2017

크리스마스를 가슴에 품는 것

일년 내내 크리스마스처럼 산다면?

크리스마스를 가슴에 품는 것

(Beyondtheordinary.com 2005년 12월 13일 인터뷰에서)

크리스마스의 본질은... 모든 존재에 대한 평화로운 선의이며 그것은 매우 높은 영적 상태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스크루지 이야기)를 보면, 스크루지는 결국 영적 실상을 발견하고 앞으로 자신의 가슴속에 매일같이 크리스마스를 품고 살겠다는 맹세를 합니다. 그것은 매우 수준 높은 바램입니다.

가슴속에 크리스마스를 품는다는 것은 포괄적인 존재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당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을 선의 속에서 하나로 묶어주는 에너지 장과 같은 것입니다. 가슴속에 항상 크리스마스를 품는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하나의 존재 방식이며, 그것은 언어나 조작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기억하기도 쉽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렇게 하겠다는 결심일 뿐입니다. 스크루지가 할 수 있다면, 분명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가슴속에 항상 크리스마스를 품으십시오.

가슴속에 크리스마스를 품으려는 태도는 세상 속에서의 존재 방식이며 그것은 점차 습관이 됩니다. 당신은 친절하고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만일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당신은 다소 자동적으로 그것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비방하는 상호의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는 무조건적 사랑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말해줍니다. “그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가슴속에서 크리스마스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어느 날 당신은 이전에는 결코 다가설 수 없었던 누군가를 바라보고 갑작스레 연민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신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변한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의 방식이 변한 것입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는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의 존재 방식입니다. 물론 우리는 해마다 상징적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그 역사적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조건적 사랑과 무조건적 용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것(가슴속에 크리스마스를 품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자신과 예수를 비교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비교는 우리를 죄의식 또는 교만심에 들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자세는 매우 의미심장하고 매우 강력한 세상 속에서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것은 극히 높게 측정됩니다. 크리스마스는 550정도로 측정됩니다. 그것은 기쁨에 찬 존재 방식이며 당신은 그러한 상태 즉 500대의 중반 속에서 기능할 수 있습니다. 500대 중반은 성인의 상태에 가까운 것입니다. 당신이 실제로 노력할 수 있는 상태는 성인의 상태이며, 그것은 세상에 대해 변화를 가져옵니다. 당신이 내보내는 침묵의 에너지는 바다의 수준을 올려줍니다. 바다의 수준을 올릴 때, 바다위에 떠 있는 모든 배들의 수준도 올려주게 됩니다.

당신의 내면에 크리스마스를 불러오십시오. 그것은 기억해야할 무언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자세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 만일 그것을 잊었다면 다시 떠 올리십시오. “오늘도 나는 가슴속에 크리스마스를 품을 것이다.” 이것은 그날을 위한 조율을 해줍니다. 이러한 조율과 존재 방식은 스스로에 대한 존중과 다른 이에 대한 존중을 불러옵니다.

크리스마스는 높은 상태이며 찬양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축제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결심하는데, 그들의 정신적 신념체계가 무엇이든지간에 그들은 모두 활기찬 높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집단 에너지입니다. 모든 영적 축제는 그러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의 본질을 직관한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항상 가슴속에 품고 싶어 하는 그것입니다. 스크루지가 얻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갑작스레 영적 실상에 대한 깨어남을 얻었기에, 기쁨의 상태로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기쁨의 상태는 그것의 일부입니다. 무조건적 사랑이 되려는 것은 결국 당신에게 내적 변형을 불러옵니다. 최선을 다해 무조건적 사랑이 되려는 것이 당신이 해야 할 전부입니다. 좀더 앞선 의식 수준에 도달하겠다는 생각은 잊어버리십시오. 왜냐하면 세상과 삶에 관계하는 태도와 방식이 자동적으로 당신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삶의 방식으로서 무조건적 사랑이 되려고 하면, 어느 날 당신이 공항에 앉아 있을 때 그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도 갑자기 당신 주변의 모든 것이 변형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아무런 경고 없이 일어나며, 모든 것은 완전히 다른 비개인적인 관점에서 그려지게 됩니다.

크리스마스의 가치는,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하나의 존재 방식으로서 크리스마스를 실천함에 의해, 노력 없이도 자동적으로 다른 상태 속으로 들어간다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노력이라는 용어 속에서 영적 진화를 맥락화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진화는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허용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사랑을 항상 그곳에 있도록 허용하면 그 상태는 당신을 다음 상태에 이르도록 변형시킵니다. 그리고 만일 방해받지 않는다면 그 상태는 다시 당신을 그 다음 상태에 이르도록 변형시키고 다시 그것은 당신을 그 다음상태에 이르도록 변형시킵니다.

가슴속에 크리스마스를 품는다는 것은 그것에 몰두한다는 것이며 신에게 그러한 상태를 성취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 신이시여, 제가 그러한 상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는 최선을 다해 그 상태 속에 있으려고 몰두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무언가가 당신을 그 상태를 벗어나도록 끌어당겨도, 당신은 그것을 이전의 방식과는 다르게 인식합니다. 이전에 당신은 다른 사람이 무례하게 군다거나 하면 그를 불쾌해 하고 또 그러한 불쾌감을 정당화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사고의 패턴입니다. 가슴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슴은 이해할 뿐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가슴속에서 살아가려 전념한다면, 가슴은 생각이 아닌 이해이기에, 그러한 타인의 무례함을 이전과는 다르게 경험하게 됩니다. 당신은 그들이 당신이 살고 있는 그러한 상태 속에 살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즉, 당신은 불쾌감 대신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그들이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를 당신은 이해합니다.

그것은 비선형적인 영적 수행을 도와줍니다. 나는 많은 학생들이 선형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정의(定義)를 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이 책 저 책을 읽습니다. 그것의 목적은 오직 정수(精髓)를 뽑아내려는 것입니다. 정수는 그 자체의 힘에 의해 구원으로 가는 수단입니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헬륨으로 가득 찬 풍선과 같은 것입니다. 일단 당신이 그 풍선을 잡았다면 당신의 팔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풍선은 당신을 들어올려 줄 것입니다. 그것은 신성한 은총의 풍선입니다. 당신은 신에게 크리스마스의 은총을 요청합니다. 그럼 신은 무어라 대답할까요? “안돼, 너는 아직 그만한 가치가 없어.”라고 할까요? (박사님은 이 말을 하고는 크게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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