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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다감 Jan 01. 2021

사랑을 알아야 사랑을 하지

믿음 소망 사랑의 철학으로 행복해지기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교회에 갔었다. 엄마는 일요일에 아빠 쉬시는데 시끄럽게 한다고 나가 놀라고 했고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녔다. 고학년이 되자 교회에 놀러 가랬더니 빠져든다며 못 다니게 하셨고 나의 기독교 인생은 끝났지만 그때 들은 몇 마디는 메아리처럼 머리에 남아있다. 예를 를면 '내게 강 같은 평화, 날마다 우리에게 간식을 주시는' 같은 껌 광고 같이 멈추지 않는 돌림 노래 말이다.


그 메아리 속에서도 믿음 소망 사랑은 단연 최고이다. 지금까지도 왜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말이 계속 되뇌어지고 '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일까?' '인생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역할은 무엇일까?' 상념에 빠지는 날이 많았고 그중 최고는 왜 믿음 다음 소망 다음 사랑을 이야기했고 마지막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 했을까 하는 그 순서에 대해 멈출 수 없는 의문을 품고 성장했다.


불교 집안에 자랐고 기독교가 조기 교육된 사람으로서 학창 시절부터 종교를 철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나였다. 믿음 소망 사랑은 풀 수 없는 숙제 같았는데 아이를 낳고 주부의 삶을 살며 그 답을 하나씩 찾을 수 있었다. 우선 집중했던 것은 믿음이었다. 왜 믿음을 가장 앞에 두었을까?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은 '스스로 그렇다고 마음속에 깊게 새기는 일'이다. 

뻔한 풀이 같지만 '믿음'의 정의를 '예수의 탄생을 받아들여라라'는 단편적인 메시지에서 벗어나 바르게 인식 하기에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믿음이라는 것이 모든 일에 앞서 있다는 것을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육아서를 많이 읽고 좋은 엄마가 되려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 많은 노력을 해보지만 아이가 소중한 인연이고 성숙한 어른이 될 씨앗이라는 '믿음' 없이는 아이를 기다려 줄 수도 존중해 줄 수도 없다는 걸 경험했다. 


나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 봐도 공부할 때 이것을 내가 풀 수 있다는 믿음 없이는 문제도 잘 읽히지 않았고 친구를 사귈 때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믿음 없이는 관계가 시작되는 경우는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도전 앞에서 뒷걸음치고 당당히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소망이나 사랑이 아닌 '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일 뿐이다. 기독교의 지난 역사와 교리와 비전을 제시하는 데 있어 '주님이 계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교리의 시작이겠구나 이해가 간다.




다음은 소망이지만 가장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었다.


소망은 뭐지? 희망? 바람? 꿈? 청년이여 꿈을 갖으라? 순서상으로 좀 갑작스러웠다. 순서에 의하면 그래 주님이 있다고 믿어. 근데 갑자기 내 꿈을 갖으라고? 분명 '사랑' 앞에 말했고 인류 주류 사상 중에 하나인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가치 TOP3에 끼어 있으니 엄청 중요한 말일 텐데 '둘째 너는 왜 거기 껴있니?' 하는 마음이었다. 


기독교에 대입해 보면 '주님이 구세주임을 믿습니다. 그러니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세요. ' 이렇게? 세상을 구원하는 큰 가치에 비해 신자의 행동 양식은 너무 자잘하고 좀 없어 보인다고 느꼈다. 인생은 내가 모르는 뭔가 대단한 것이 있고 큰 뜻이 있으리라 믿고 살 때는 내가 잘되길 바라는 나의 자잘한 바람을 간직하는 것이 사랑이나 믿음 같은 큰 가치 중에 두 번째 순서라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망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 그 믿음이 없다 보니 소망 따위 쉽게 취부 해 버릴 수 있었다.(역시 믿음은 첫째!)

그런데 육아 시간을 보내며 사랑을 깨닫고 난 후에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느끼니 그것이 바로 소망이었다.


사랑이 있어도 소망이 없으면 목적지 없이 떠있는 그저 아름 다운 낙엽 같았다. 소망은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줄 수 있는 의식의 목적지, 희망, 그리움과 같은 나를 인간답다고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셋째 가라면 서러울 가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의 시크릿이라고 해서 바라는 바를 명확히 하고 굳게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유행 중이다. 이것 역시 믿음과 소망의 중요성에 관한 이야기라 생각된다.




이제 대망의 사랑이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 최고가 사랑이라는데 사랑은 무엇일까? 사실 사랑은 너무 포괄적이고 막연하고 순수하게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사랑을 잘 모른다.


집착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 느끼기도 하고 쯧쯧 혀를 차며 도움을 건네면서도 사랑이라 생각한다. 나만 봐, 내 이야기 먼저 들어, 내 욕심 먼저 채우자고 하면서도 너를 사랑하니까 너에게 이런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집착, 욕심, 단정 지음 같은 것은 아무리 뜨겁고 영혼을 받친다 해도 사랑이 아니다. 상대가 존재로써 그대로 가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믿음이나 소망처럼 내적 영역이 아니라 표현적이고 상호 교환의 과정과 함께이다 보니 그 순수함과는 다르게 매우 복잡한 감정과 섞여 있는 것 같다. 


더욱이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어서 그런대로 각자의 경험치 속에서 느낀 대로 아는 만큼 그럭저럭 알고 느끼고 산다. 사랑은 핵심 가치 중에 셋째이지만 그중 최고라 하는 가치이지 않은가! 왜 우리는 사랑을 잘 모르면서 사랑에 대해 깊이 다루지 않고 자녀, 후대에게 바르게 전할 뜻을 품지 못하는 것일까 안타까웠다. 사랑을 정확히 알고 실천하고 싶어 계속 탐구 중이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관계는 엄마와 아기이다. 엄마의 자애로운 눈빛과 포근한 품은 사랑 그 자체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알았다. 사랑의 시작은 자기 자신에서부터라는 것을 말이다. 


만약 외부의 적이 쳐들어와 아이와 엄마를 공격한다면 엄마는 목숨 바쳐 아이를 지키겠지만 아이와 엄마 둘이 있게 되면 엄마는 자신이 버티고 살기 위해 아이를 공격한다. 내가 그래 봐서 잘 안다. 고립된 공간에서 긴 시간 아이와 엄마 단 둘이 있다 보면 사랑이란 이름으로 표면적인 배려들이 제공되지만 엄마에게 정신적 충족이 안 되는 상황이 지속되면 엄마는 폭주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 정말 자신에 대한 사랑, 내 존재로써 가치 있음에 대해 스스로 인정하지 못한다면 엄마는 사악한 괴물이 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은 물론 내 아이를 사랑하기도 어렵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힘이 모성의 토대임을 알 수 있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됐다. 나쯤은 괜찮다고 생각하고 아이에게 헌신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결국은 아이에 대한 사랑은 사랑이 아닌 희생에 대한 보답을 내놓으라는 협상 혹은 협박이 었다는 것만 확인할 뿐이다.


나의 한 끼니를 잘 챙기고, 내 외모를 가꾸고, 내 생각을 진솔하게 전 달 할 때 사랑이 시작될 수 있다. 나를 사랑해야 나의 가족과 환경이 '사랑받는 이의 것'이 되고 사랑받는 것들에 둘러 있어야 사회는 내가 사랑받을만하다는 것을 알고 배려를 베푼다.


사랑을 줄 때는 존재 자체에 대한 가치로움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사랑을 받을 때는 배려하는 태도로써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배려를 받는다는 것은 아주 소중한 경험이고 우리가 쌓아가야 할 중요한 경험 중에 하나다. 


그런데 만약 방법이 바뀌어 사랑을 줄 때는 배려하는 자기 행동만 생각하고 받을 때는 가치를 인정받고자 한다면 사랑은 희생으로 변질되거나 타인의 판단에 목매는 불행의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태어나 살다가 번식하고 좀 더 살다 죽는다. 그 안에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가치들이 있다. 그 가치들 때문에 인류는 전쟁과 평화, 핍박과 구조, 발전과 훼손을 넘나들며 어딘가로 치닿고 있다. 하지만 믿음, 소망, 사랑의 가치를 마음에 세긴다면 어찌 보면 하찮고 어찌 보면 부담스러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간단하게 답을 찾을 수 있다.


믿음 소망 사랑의 종교적 구어체는 '전능한 주님이 있다고 믿고 소원을 말해봐. 너에게 사랑이 있다면 이루어질 거야'일 테지만 종교를 철학적으로 받아들이는 나로서는 믿음 소망 사랑은 단지 종교적 메시지를 넘어서 인류가 발견한 가치 있는 사상이라 생각하고 모든 삶에 적용되길 바란다.


[믿음] 나는 지금 이대로 괜찮아. 태어나 살아 있다는 것 만으로 이미 최고의 가치야. 살아 있음은 사실이야.

[소망] (시대에 관심 갖고 지혜를 키워 글과 말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응원하면서 안전한) 삶을 살 거야. 

[사랑] 삶은 정해진 답을 맞혀가는 게 아니야.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내가 꾸려 가는 대로 축적하는 기억의 모음인 거야. 나의 삶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기억하느냐가 가장 중요해. 그러니 지금 이대로 너를 사랑하는 게 그렇게 살려고 하는 게 잘 사는 거야. 사랑스러운 나와 함께 하는 지금 여기 모두가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ps. 실제던 상상이던 지은 죄가 많아 자신을 사랑하기 어려운 님께 믿음 소망 사랑을 전하고 싶어요. 


[믿음] 당신은 지금 살아 있습니다. 

[소망] 살아있음의 빛으로 당신만의 믿음 소망 사랑을 가만히 기록하고 매일 기억하면서 행복하게 사세요. 당신이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없이 자기 껍데기만 위하던 지난날의 죄를 멈추는 것 만으로 세상이 그만큼 행복해집니다.

[사랑] 지난날 죄를 스스로에게 계속 묻지 마세요. 이미 돌이킬 수가 없어요. 피해자의 피해를 그대로 인정하고 사죄하세요. 비난이나 피해자가 있다면 죄 값으로 여기고 그들의 어려움을 수용해 주세요. 

마음에서는 죄로 느끼면서 행동은 거부하고 변명하길 멈추지 않으면 당신이 행복할 수가 없어요. 잘못을 인정하고 더 이상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짐하고 주의를 기울이는데 온 힘을 다하는 것이 잘못을 외면하고 결백을 주장하는 것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인류를 위한 일이에요. 힘내세요.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용서하고 가치 있는 삶을 꿈꾸며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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