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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다감 Feb 09. 2021

눈 감고 있으면 명상인가요?

명상 첫걸음

성공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아침 명상이 필수적이라던데 왜 명상이 중요한지는 제쳐두고 도대체 명상이 뭘까? 눈 감으면 명상 일까? 조용한 음악 틀어 놓으면 되는 건가? 고민거리에 집중해 보는 건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생각을 비우라는데 어떻게 생각을 지우지?


명상을 배우고 실천하는 나도 명상이 쉽지만은 않다. 그러다 보니 명상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소개할 수 있을까 하는 도전심이 생긴다.




나의 경우 명상이라고 하면 우선 부처상이 떠오르고 골방에 등을 보이고 앉은 스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향냄새가 나고 고요한 가운데 나뭇잎 부비는 소리와 풍경이 딸랑거리는 소리도 연상이 된다. 고요하고 차분한 기분도 들지만 다리가 저릴 것 같은 불편함도 밀려온다. 


문득 10년 전 처음 명상을 접했던 시간이 기억난다. 


동네 요가학원에도 한 번 가본 적 없던 뻣뻣한 내가 명상에 대한 호기심 혹은 이끌림으로 원광대학교 요가명상학과에 편입을 했고 오리엔테이션에서 맞이한 풍경은 화려함과 당혹감이었다. 


요가 깨나 해본 듯한, 복장이 화려한 사람들이 절반이 넘었고 나와 같은 생초짜는 오직 나뿐이었다. 오티에 앞서 요가 수련시간이 있었다. 다른 움직임은 얼렁뚱땅 진행자를 따라 했다. 극단 운영할 때 후배들 신체훈련을 담당했던 근력과 움직임이 있어 어느 정도는 믿는 구석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박쥐 자세라고 하는 양다리를 쭉 펴서 벌리고 앉아 손은 발끝을 잡고 상체를 바닥에 붙이는 자세를 하게 되었을 때 순간 모든 참가자가 일제히 바닥으로 엎드려 사라지고 넓은 홀에 나만 구부정 발끝을 잡고 앉아있었던 길고 외롭고 부끄러운 시간이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요가원 원장이거나 선생님 경력 혹은 수련 경험이 오래된 분들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침묵 명상 수련회에 참가했을 때에도 당혹스러움은 있었다. 미간에 의식을 두라는 안내를 받았다. 생각 많은 나로서는 미간이라 함은 정확히 어느 지점쯤이고 피부 밖에 의식을 두라는 건지, 뇌 안쪽에 의식을 두라는 건지. 코끝에 호흡이 오고 가는 것을 바라보라는데 그 코끝이 콧날 끝인가 콧구멍인가 헷갈려 이리저리 의식을 옮겨보고 궁금해하느라 집중을 못했다. 


등이 자꾸 구부러져서 명상이 아니라 앉아서 조는 사람 같은 몸이 되었고 상체를 바르게 세울 때마다 마비된 다리를 달래느라 조심스레 움직였었다. 한 시간 가량의 시간이 내면을 바라보기는커녕 몸에 끄달 리느라 분주하고 고되고 복잡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많이 부끄러웠지만 사실 요가나 명상을 처음 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어 지금은 편하게 첫 경험의 감상을 나눌 수 있다. 명상을 처음 접할 때 고수들과 함께했던 것도 큰 배움이 되었지만 초급자는 초급에 맞게 경험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 초급 입문자를 위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서문에 답하자면 명상은 호흡 방법, 분위기, 행동 등이 핵심이 아니다. 명상은 바로 '나에게 시간을 온전히 할애하는 활동'을 말한다. 내 몸이 느끼는 오감, 숨 쉬는 상태, 생각의 흐름, 감정 등을 온전한 시간을 내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다. 편한 자세로 정신줄 놓고 퍼지는 것이 아니라 선명하게 빛나는 의식으로 높은 차원에서 나의 생각, 느낌, 호흡을 온전히 바라보며 온전한 나를 경험하는 것이다. 


명상은 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그 상태를 알 수 없다. 하지만 해보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명상을 하기 전에 꼭 알야 할 것은 바로 '나를 이루는 것이 여러 개라는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저는 송다감인데요!' 그렇다. 우리는 우리 이름을 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송다감은 나를 일컫는 이름이다. 나는 누구지? '도를 아십니까?'물을 일이 아니다. 나는 누구지? 


우선 나는 태어나고 죽는 몸, 살고 죽는 우리 몸이 나이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나라고 느껴지는 생각의 주체도 나이며 가장 큰 의미에서 내가 잠을 자거나 의식이 없을 때조차 나에게 연결되어 있는 생명 에너지인 영적인 나도 나이다. 나는 몸과 마음과 순수의식으로 이루어진 다차원적 존재라는 앎이 있어야 명상이 가능하다.


자기 인식의 범위가 자기 이름 혹은 생각하고 있는 주체 정도로 좁다면 명상을 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마치 신의 메시지를 받으라는 건가? 아무 생각하지 말라는 게 멍청해 지라는 건가? 같은 혼란을 경험할 수도 있다. '나'라는 존재가 여러 차원에 걸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고차원의 시선에서 몸과 마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인식을 하는데서 명상, 온전히 바라보기를 할 수 있다. 


여러차원의 나를 인식하라는 말을 달리 말하면 세계관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넓은 세계가 있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일상에 매몰된 시야를 끌어올려 넓은 시야로 명상하면 된다는 것이다. 애매하더라도 연습을 하다 보면 좁은 시야가 차츰 넓어지며 흐릿하던 나의 존재와 세계가 확실하고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명상을 잘하기 위해 어디선가 세계관을 짜잔 넓히고 와서 명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니 명상이 뚜렷하지 않아도 고차원적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는 느낌으로 명상하다 보면 점점 차원이 높아짐을 느낄 수 있는 말이다.


명상의 끝, 알아차림의 끝은 삼매의 경지이고 득도일 수 있다. 그렇다고 내 절실한 꿈이 성불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득도를 위해 명상 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는 없었겠지만 아마도 몸을 갖고 태어나야 경험할 수 있는 지금의 삶을 살면서 명상을 통해 순수한 나를 경험하고 충만함, 안정감, 감사함을 경험하면서 고차원적인 나의 가치를 꽃피우고, 열매 맺고, 내 한 평생을 행복하게 누리기 위해 명상을 하는 것일 것이다.


첫 질문에도 답하고 싶다. 왜 성공한 사람들은 명상을 할까? 그것은 명상을 통해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안정감과 여러 차원 중 하나인 몸을 바르게 인식하면서 육체의 유한함을 인정하는데서 오는 집중력이 나를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고 행복을 누리게 만드는 원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단순히 집중력을 키워 성적을 올리거나 스트레스를 풀어 꿀잠 자는데 만족한다 해도 명상을 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긴 하다.


오늘은 잠시 시간을 내어 가만히 나를 이루고 있는 몸과 마음을 바라보면 어떨까? 

음악을 틀거나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된다. 

눈을 감거나 바르게 앉지 않아도 된다. 

가만있어도 알아서 쉬어지는 숨을 얼마간 바라보자.

알아서 떠오르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음을 얼마간 들여다 보자.

몸과 생각을 느끼고 있는 나의 순수한 존재를 어렴풋이 느낄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다가 문득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위로 받는 느낌을 경험 할 지도 모르고 더 깊은 명상이 하고싶어질 지도 모른다. 

이렇게 명상에 스며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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