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다감 Feb 10. 2021

요가와 명상

명상 그리고  종교 이야기

'요가'라고 하면 몸을 유연하게 하고 몸매가 좋게 하는 운동이라고 많이 생각한다. 허리를 리듬 체조하듯이 꺾거나 다리를 목에 걸어 올리는 묘기 혹은 고행을 요가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요가는 몸과 마음 그리고 영적 에너지가 '하나'를 이루도록 수련하는 것이다. 요가란 바로 '합일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개인적으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일체를 이루는 수련이 요가라 생각한다.)


나를 이루고 있는 몸과 마음과 영성의 합일 즉 요가를 이루기 위해 다양한 수련들이 통합되어야 한다. 


행할 것 (야마)

행하지 말 것 (니야마)

몸의 동작 수련 (아사나)

호흡 수련 (쁘라나 야마)

감각 조절 (쁘라따 하라)

집중 (다라나)

명상 (디야나)

깨달음 (사마디)


아사나와 명상은 요가를 이루는 여러 수련법 중에 하나인 것이다.


우리가 보통 요가 학원 간다고 하면 아사나의 체형조절 기능에 집중하지만 사실 아사나를 통해 몸의 움직임과 호흡조절에 의식을 두는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이라 받아들이는 것이 더 맞다. 아사나는 명료한 정신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그 밖의 수련을 실천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이는 명상의 측면에서 아사나를 하는 이유가 '더 잘 앉아서 명상하기 위해'라고 하기도 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시야를 너무 좁혀 말한 경향이 있다. 아사나는 오직 잘 앉아 있기만 하려는 것을 넘어 에너지를 소통시킬 수 있는 몸을 정화하고 더 큰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수련하면서 몸과 호흡을 통해 더 적극적으로 깊은 요가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요가 학원에서 배울 수 있는 아사나 말고도 명상법은 다양하다. 


호흡에 의식을 두거나 들숨과 날숨의 길이를 조절하거나 좌우 콧구멍을 열고 닫음을 통한 호흡 명상.

콧등, 허공, 촛불, 만다라 등을 응시하는 얀뜨라.

옴, 기도문, 찬송가, 확언 등을 소리를 내어 명상하는 만뜨라.

세기 고자 하는 글자를 머릿속에 쓰거나 기도문을 마음속으로 암송하는 묵독 명상. 

편안한 노래, 싱잉 볼, 명상 중 뇌파와 공명하는 소리를 들으며 하는 소리 명상.

걸음과 손동작 등 움직임의 의도와 행동을 바라보며 걷는 걷기 명상

음식의 모양, 냄새, 소리 등을 인식하고 입에 넣어 침이 나오고 죽이 되는 과정을 바라보고 삼키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먹는 먹기 명상.

향을 피우거나 아로마 오일을 활용해 이완하고 파장을 키우는 아로마세러피.


소개한 명상의 공통점은 바로 몸이 있어야 가능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감을 통해 알아차려지는 것에 온전히 집중하고 명상하며 요가를 이루어 갈 수 있다.


그렇다고 이렇게 다양한 명상을 모두 실천해야만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명상법에 욕심을 낼 필요는 없이 어떤 명상이든 내가 하고 싶은 방법을 선택해 집중하고 명상하면 모든 끝에는 '내가 궁극의 그것이구나'하는 내가 있다는 알아차림과 평안함을 가질 수 있다. 선명한 알아차림의 경지는 사마디의 경지임으로 평범한 우리가 생전에 경험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길을 따라 수련하는 과정에서 일상의 평화와 행복을 경험할 만큼은 명상의 값을 누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 역시 내가 궁극임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했고 예수나 부처 같은 성인들처럼 깨달음을 얻고 요가를 이룰 장대한 꿈도 없다. 하지만 명상을 통해서 살고 죽고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어두운 공포의 터널을 걷듯 불안하고 두려워 아등바등하지 않고 싶다. 내가 궁극의 그것임을 믿고 순응하고 주어진 시간과 지금이라는 귀한 내 삶을 가치롭게 누리고 싶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내가 궁극임을 믿는 힘을 기르는데 있어 기독교는 정말 편리한 요가법이라 생각한다. 주님이라는 영성을 외부 인격으로 정하고 그는 내 안에 있고 어느 곳에나 있고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 것이 내가 내 영성, 존재를 믿고 내 몸을 온전히 느껴 내 마음을 사랑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는 것보다 심리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믿는 대상만 다르지 결과는 같은 것임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종교를 갖지 않는 이유는 이대로 좋기 때문이다. 나의 빛은 종교 지도자가 이끄는 단체처럼 화려하고 밝게 빛나지 않아 안타까워 보일 수 있지만 이대로 고요하고 따뜻하고 오르락내리락 흥미진진하다. 여러 종교에서 말만 조금씩 다르고 같은 교리를 말하는 것을 두루 듣고 따르는 것도 자유롭고 만족스럽다. 


인류에 발생한 종교들의 교리가 하나의 메시지를 향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로서 궁극의 에너지 합일을 말하는 요가 쑤뜨라 경전은 내 뜻과 가장 닮아있다. 요가 쑤뜨라가 쓰인 연대기가 B.C400로 가장 오래 전임으로 가장 먼저 깨달았던 빠딴잘리라는 인생 선배의 메시지를 따르는 것이 순수하다고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등학생 때부터 대보름이나 추석 때 달에 소원을 빌거나 부처님 앞이나 기도를 올릴 대상을 만나면 지금까지 외우는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 '나로서 온전히 행복하게 살기' 그리고 마흔 살이 넘으며 꿈이 조금 커져서 '나와 비슷하게 불안과 걱정이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명상을 통해 이제는 빌고만 있지 않고 천천히 실행해가고 있다. 명상의 도움으로 지혜로운 선택과 경험을 쌓아 다음 세대에게 무사히 생명의 바통을 넘겨주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눈 감고 있으면 명상인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