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붙잡혀서
공부하고, 학교가 끝나면, 바로, 학원에서 새벽 2시까지 수업을 듣고,
4시간 자고, 7시까지 학교를 가야했던 나는.
대학생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하려고 한 일은,
카페 아르바이트였다. 돈을 벌고 싶었다.
평생 가족 위해서 힘들게 돈을 버는 엄마,아빠를 돕고 싶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새벽 4시까지 카페 서빙을 할 거라고 하니까
엄마,아빠가 위험하다고 반대를 하셨다.
그래서, 나도 포기를 했었다.
그런데 나는 다시 돈을 벌어야겠다 생각했고,
주말에만 오전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카페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다행히 사장님, 직원분들을 좋은 분들을 만나서
정말 재밌게 일을 했다.
중국에서 온 오빠는 커피 만드는 법과 칵테일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어서
그곳에 오는 커플들에게 가끔 칵테일 무료 서빙을 해주었다.
또, 오빠는 시간 날 때마다 중국어도 가르쳐주었는데, 너무 어려웠다.
직원분들은 점심 저녁으로 맛있는 음식도 많이 해주시고,
친절하게 잘해주셨다.
사장님은 새벽 2시까지 밤길이 위험하니까
늘 차로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어서 안전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일을 했던 곳은, 가방 판매와 양말판매, 백화점 케셔였는데,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고, 함께 집으로 오고는 했다.
외국인들이 자주 와서 외국어로 물건을 판매하거나, 길을 알려줘야 했다.
그곳에서 스토커도 있었는데, 서 너 명의 내 친구들이 내 주위로 감싸서
위험한 일을 당하지 못하게 막아주었다.
(내 친구들은 그런 일에 굉장히 예민했었고,
우리는 나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상당히 조심했었다)
또, 친구와 함께 꽂게집 서빙도 했었는데, 동생들이 착해서 함께 서빙을 하는 재미가 있었다.
친구와 함께 결혼식 뷔페 아르바이트도 하고, 길 거리에서 전단지도 돌려보았는데, 너무 추웠다.
평일은 대학교를 다니고, 저녁에는 소모임이나 연극모임 연습을 하고,
주말이나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렇게 살던 4년.
돈 버는 걸 굉장히 좋아하던 나는, 아르바이트를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하는 아르바이트는
한계가 있고, 월급이 오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대학교 졸업장을 꼭 빨리 따서, 취업을 나가야겠다고...
그 뒤부터 나는 공부를 더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
졸업하기 위해 필요한 학점이나 토익점수를 빨리 따기 위해 애썼다.
방송사에 취업되기 전부터 프리뷰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때, ebs에 취업이 되었는데,
오전 9시30분부터 새벽 4시까지 우리는 쉬지도 못하고,
공장처럼 앉아서 촬영 테입을 보고, 프리뷰를 해야했다.
나와 같이 일을 하던 작가언니는 내일 나오지 않으면,
도망간 거라 알라 했고,
나는 이상하지만, 좀만 더 버텨보자고 했다.
그렇게, 피아노전공자였지만, 손을 다쳐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방송작가를 시작한 언니는, 매일 피아노를 연습하던 그 손으로
매주 촬영테입 100개를 나와 함께 보고, 꼼꼼하게 기록하는 프리뷰를 했다.
프리뷰라는 건, 촬영테입을 보고 tc 시간타임과 영상 설명, 대화 내용, 인터뷰를
전부 다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 하루 종일을 해도, 둘 다 한 개 밖에 못하고, 좌절했던 우리는
3개월 만에 프리뷰의 신으로 거듭났고,
매주 들어오는 100개의 테입을 둘이서 반반 나눠 30~40분 짜리 테입 50개씩,
하루에 10개씩 프리뷰해서 프리뷰 노트로 만들었다.
가끔, 피디님은 나를 복도로 불러서,
이미지재연에 필요해서 촬영을 해야 하니,
토마토를 벽에 던지라고 했다.
나는 프리뷰를 하다 말고, 열심히 벽에 토마토를 던졌다.
그렇게 3개월 만에 2박 3일 동안, 독하게 100개의 테입을 프리뷰어 2명과 함께
마무리하다, 나는 맹장이 터졌고,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맹장수술을 했다.
간호사였던 엄마는 내가 맹장수술을 하거나
방송 원고를 쓰다가 위염이나 장염으로 응급실에 실려가서 링거를 맞고 입원할 때마다
차라리 간호사를 하면 안 되냐며 나를 뜯어말렸고,
남의 말 듣지 않고, 자기 주관 확고한 나는,
죽을 때까지 방송원고를 쓰다가 죽을 거라고 했다.
그런 상상을 했었다.
방송원고만 쓰다가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그것은 내가 연극을 시작하면서, 연기, 연출을 하면서,
몸에 베인 습관이었다.
연극하다가 무대에서 죽듯,
방송하다가 나도 이곳에서 죽으리라.
(적어도 50살까지는 할 줄 알았는데
35살도 안 되어서 몸에 이상이 와서 구토를 하고,
죽을 뻔할 줄은 몰랐다
진짜 생의 마지막, 죽음에 와서야 나는 일을 줄이고, 봉사를 시작했고,
내 삶에 대해 돌아보기 시작했고,
다시 건강을 챙기기 시작했다)
방송작가 생활은, 남들은 쉽지 않았다고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더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과 아픔을 겪었던 나로서는,
그 일이 제일 재밌고, 내 적성에 맞고 쉬웠다.
매주 3일씩 밤을 새도, 하루에 4시간 밖에 못 자도,
하루에 2시간 밖에 못 자도,
나는 그 일이 제일 쉬웠고, 재밌었다.
피디나 출연자들은 젠틀했고
워낙 내가 선긋고 벽치기에 대가인지라
방송사에서 사생활 관리를 철저하게 했고,
성희롱, 성추행이나 성폭력은 한 번도 없었다
내게는 이곳이 천국이었다.
막내작가시절을 거쳐 서브, 메인작가가 되기까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연예인 매니저 때문에 화장실에서 남몰래 울다 나오는 날도 있었고,
선배 언니들 때문에 혼자서 일을 도맡아 하면서,
아무런 돈도 백도 없었던 나는... 너 백있냐? 소리까지 들어가며
모욕감을 참으며 일을 했다.
그래. 너 가난하거나 백없냐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대학교 때는, 열심히 공부하고 책읽고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구보다 많은 책을 읽었던 나를 모르고,
내 친구는, 너는 집에 돈이 많아서. 라는 말을 했었다.
내가 전국글짓기대회에서 1등 한 점, 면접에서 정말 화려한 말발을 자랑한 걸
얘는 몰랐을 테니까.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몰랐던 걔로서는,
그런 착각과 오만이 당연할 수도 있었다.
그때 나는, 사실 아무 것도 없었지만,
내가 직접 보여주기 전까지
매번 오해받는 게 일상이었고, 다반사였기 때문에
나는 또 묵묵히 아무 말하지 않고 넘어갔다.
나란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결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으니까.
메인작가가 되었을 때도,
나의 진가를 알아봐주는 사람과 진짜 사람을 볼 줄 모르는 사람에 따라
평가는 나뉘었다.
보통 나의 진가를 알아봐주는 사람은,
선하고, 책을 많이 읽고, 성공했으며, 예의범절이 바르고,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하고, 잘되게끔 애쓰려 하는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작가생활을 오래 할수록
연예인이나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은 없어지기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고 3개월, 6개월, 1년, 3년, 5년, 7년, 10년의 고비만 잘 넘기면
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꾹꾹 참으며 잘 넘겼고,
힘들 때는 친구들이나 친한 작가들과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실제로 나는, 선배들이나 사장님들이 나를 엄청 예뻐라 하셨고,
나에게 그 말을 한 메인언니는 몰랐지만,
그곳 사장님(kbs골든벨 국장님)은, 전 내가 있던 프로덕션 여사장님(작가님)과 절친이셨고,
내가 전 프로덕션에 있을 때부터,
나를 눈여겨보고, 예뻐라하셨었다.
ebs, kbs일을 하면서, 그곳 여사장님을 비롯, 선배작가님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두 명의 내 직속 선배작가님들은 원래 나를 kbs 피플세상속으로에서 입봉시키고 싶어했다.
나는 당시 나이, 24살이었다.
내가 어떻게 30분짜리 방송을 맡냐고 했다.
언니는, 자긴 3개월 만에 인간극장도 맡았다며, 자신이 봐줄 테니까
너도 할 수 있다고 이곳에서 입봉하라고 했다.
나를 어떻게든 입봉시키고 싶어했던 선배님들이
지금도 너무 고맙다.
그러나, 나는 10분짜리부터 하고 싶다고 했고,
kbs, ebs, sbs, mbc, 케이블 등 아침 저녁 교양, 예능, 다큐 등을 돌며,
매일 월~금 1시간 생방을 맡기까지,
조금씩 점차 넓혀나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프로그램을 다 섭렵했고,
교양, 예능, 다큐, 뉴스, 생방송, 토크쇼 등
다양한 프로그램 원고를 쓸 수 있었다.
그렇게 해야 발빠르게 감을 익힐 수 있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넘나들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욕심히 있었기 때문에
점차 내 실력이나 능력을 키워나가는 게 너무 재밌었다. 당시에는.
막내작가나 서브작가 때는, 지나가다 인터뷰도 많이 당해서
피디님들이 인터뷰 전문 작가냐 놀리기도 하고,
피디님들이나 작가언니들은 나를 방송에 더러 출연시켰다.
티비 앞에 서는 게 정말 너무 싫어서 작가를 하는 거였지만,
먹고 사는 일이니까, 눈 딱 감고 했다.
나보다 더 외계인같았던 그 피디님은 나더러 외계인이라며,
사돈남말할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나를 자신이 하는 간판 프로그램 메인mc옆에 세웠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메인mc옆에 세우는데, 나에게 언질도 주지 않았다.
나를 뭐를 믿고...
또 작가언니들은, 서브들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히지 않나,
스님이 하는 프로그램에도 나가고 그랬다.
과학 프로그램을 할 때는, 직접 과학 실험이 가능한지
작가들이랑 밖에 나가서, 안에서든,
유튜브를 보고 직접 실험을 한 뒤, 촬영 구성안을 쓰고,
피디님을 촬영에 보냈다.
작가는 출연 뿐만 아니라,
제일 중요한 건 섭외를 잘해야 했다.
아이템 찾기와 섭외력이 방송 시청률을 결정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예능 프로그램은 섭외가 쉽게 되는데 비해,
교양이나 다큐 프로그램은 아이템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나는 아이템을 찾기 위해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온갖 온라인기사들을 서칭해야했고,
국회도서관에 있는 잡지를 다 뒤져가며,
좋은 아이템 찾기에 혈안이 되었었다.
'피플세상속으로'에 나온 아이템은 '인간극장'으로 많이 방영이 되었다.
30분 짜리지만, 5부작 까지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진정성 있는 아이템이어야 했고,
아이템을 찾는 것만큼이나, 섭외, 취재도 잘해야 했다.
보통 다큐작가가 되면, 기본적으로 취재가 는다.
집에 있는 숟가락 갯수가 몇 개인지 알아야 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취재를 해야 하는 우리는,
공감능력이 발달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양다큐예능 프로그램 작가를 하다 보면,
끈질겨진다.
말하자면, 스토커기질이 늘어나는 것이다.
정말 힘들게 찾은 아이템일수록,
어떻게든 섭외를 해야 하고,
섭외를 하기 위해서, 간절하게 애원한다.
섭외하다가 운 적도 있다.
출연자들은 불쌍해서, 출연에 응해준다.
그렇게 힘들게 출연에 응해준 만큼,
피디도, 정말 최선을 다해 성심성의껏 촬영한다.
피디들은 아이템찾기와 섭외가 얼마나 힘든지
작가들이 얼마나 피고름으로 아이템을 찾고, 섭외를 하고,
국장님께 컨폼을 받는지 알기 때문에
(국장님 컨폼이 나지 않으면, 피디는 촬영을 갈 수가 없다)
가장 낮은 자세로, 겸손한 마음으로,
출연자의 진정성 있는 모습을 담고자,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함께 일하다 보면,
서로가 하는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서로를 더 존중하고, 서로에게 더 잘해주게 된다.
그래서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주고, 터치하지 않으며,
서로를 믿고, 각자 맡은 임무에 충실하게 하고,
함께 회의하거나 의논하거나 편집할 때는,
또 머리를 맞대고 일한다.
(일도 힘든데, 사람까지 힘들면, 함께 일할 수가 없다)
나는 선배복이 좋았는데, 선배들은 내게 잘해주고, 따뜻했다.
그런 선배들 덕분에 빠르게 일을 배울 수 있었고, 남들 보다 빨리 메인작가가 될 수 있었다.
어쨌든, 메인작가가 되니 좋았다.
나는 피디복이나 선배들 복이 좋았는데, 입봉했을 때부터 좋은 피디들을 만나,
편안하게 원고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어려워하기도 했지만, 더 편안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내가 누군가를 더 도울 수 있는 점이 많아져서 좋았다.
정말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일할 수 있었다.
매주 100명을 만날 때도 있었다.
인생 얘기에 대해서도, 전보다 더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었고,
일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방송작가를 하면서,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참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내게는 천국같았던, 참 행복한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