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극복기
*광화문 숲 정신과, 정정엽 전문의의 글에서 펌했습니다.
"너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를 사랑하는데
너가 계속 거절하면 그 사람 마음이 어떻겠니?"
"슬프겠죠."
트라우마로 인한, 나의 가장 고질병이었다.
트라우마를 경험하거나 목격하면
공포, 두려움, 무력감 등 다양한 감정과 신체적 반응을 느끼며
이에 트라우마와 맞서 싸우거나, 도망간다고 하는데,
나는, 도망치는 방법을 택했던 것 같다.
성장이란, 다양한 측면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죄책감이나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이언킹의 어린 사자였던 주인공 심바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이야기를 통해 내적 성장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받아들이기 힘든 거대한 사건을 겪은 후, 도망치고
여러 인물과 관계성을 통해 천천히 일상을 회복하며
결국,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서사는,
동화적인 상상력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어린 심바는 프라이드 랜드를 다스리는 아버지 무파사에게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배운다.
무파사는 보호자이며 교육자로서 어린 심바에게 하나의 세상, 그 자체의 존재이다.
하지만, 심바가 성장 단계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채 익히기도 전에
불행한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왕좌를 향한 욕심을 조절하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를 받아들이지 못해 삐뚤어진 무파사의 동생 스카로 인해
무파사가 죽고 만 것이다.
스카의 계략으로 무파사가 죽은 뒤, 스카는 어린 심바에게
"네 탓에 무파사가 죽은 것"이라는 죄책감을 심어준다.
어린 심바는 아버지 무파사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죄책감과 두려움에 못 이겨 현실을 등진 채 프라이드 랜드에서 도망친다.
이처럼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을 제대로 마주보지 못해 현실에서 도망쳐버린다.
견딜 수 없는 트라우마라면 도망치는 것도 방법의 하나다.
하지만, 도망쳤기 때문에 트라우마가 더욱 가중되는 경우 문제가 된다.
티몬과 품바는 지쳐 쓰러진 심바를 발견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쿠나마타나는 스와힐리어로 문제없다는 뜻이며
애니메이션에는 근심 걱정 모두 떨쳐버려 라는 뜻으로 쓰인다.
심바는 이를 통해 위로받고 회복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품바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끼고 노래했지만
심바는 그렇지 못하다.
어쩌지 못하는 과거에 대한 도피라는 측면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받아들이지 못할 과거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힘을 회복할 여유가 필요하다.
라이언 킹은 사건 직후, 곧바로 상처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의 시간을 갖는 장면을 설정하여 극에 밀도를 더하는 영리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티몬과 품바는 심바에게 회복과 여유를 알려주는 것 외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쿠나마타타의 삶을 통해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던 세 인물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티몬은 별이 검은색 천에 반딧불에 박혀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품바는 별이 가스 덩어리라는 식견을 말한다.
그리고 아버지 무파사가 해준 말을 떠올린다.
"심바, 별들을 보렴. 하늘에서는 위대한 선왕들이 우릴 지켜보고 있단다.
혼자라고 느껴질 때면 널 지켜보는 선왕들을 생각해.
늘 인도해주실 거야. 그리고 나도 있을 거야"
심바가 아버지 무파사를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아닌
자신을 지켜보는 존재로 떠올렸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어린 시절 친구였던 날라를 만나고 즐겁게 지내도
심바는 행복해지지 못한다. 심바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있기 때문이며
그 때문에 생긴 죄책감과 두려움에 여전히 갇혀있기 때문이다.
날라는 행복했던 기억을 상징한다.
행복했던 기억은 우리가 현재를 살아갈 힘을 주지만, 근본적인 트라우마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심바에게 힘을 주는 건 날라가 아닌 라피키이다.
라피키는 무파사가 다스리던 프라이드 왕국의 수상으로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며
무파사와 심바를 이끌어주는 존재다.
어른이 된 심바는,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도망쳤다는 사실과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 전에 아픈 과거와 맞서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과거는 너를 아프게 할 수 있지. 그런데 그 과거는 말이야.
도망칠 수도 있고, 뭔가를 배울 수도 있는 거지"
심바는 이 말을 바탕으로, 용기를 내어 트라우마로 상징되는 인물인 스카를 마주한다.
그리고 당시에 스카가 아버지 무파사를 절벽에 떨어뜨리는 모습을 떠올리고
과거를 극복하게 된다.
라이언킹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충분한 회복기간과 주변사람들과의 관계는 개인의 아픔을 보듬고,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게 한다.
어린 사자였던 심바는 어른 사자가 된 후에도
트라우마에 갇혀 있었지만, 내적 성장을 통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게 된다.
"삶을 살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난다는 걸.
그리고 우리가 아는 단 한 가지는 바로 이거지. 모든 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