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인연)
인연이란 무엇인가? 일식(日蝕)이 일어나는 날. 그 커다란 태양의 빛을, 가리는 달. 지구는 달 때문에 해를 보지 못하고, 해는 달 때문에 지구를 보지 못하는 상황. 오롯이 달과 지구만 바라보며 지구는 달과 인연인가보다 생각할 수 있지만, 알 수 없다. 달과 태양이 인연이고, 지구는 조연임을. 어떻게 알겠는가. 지나고 나니 그 사람이 인연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과 내가 그 순간 세상의 주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서핑이라는 스포츠로 인도해 줄 서핑샵을 찾아 송정해수욕장으로 갔다. 2022년 8월부터 시작하여 2023년 4월까지 꾸준히 홀로 서핑을 했다. 이제는 실력도 늘려야 하고 서프버디도 찾아서 보다 풍성한 서핑을 즐기고 싶었다. 한창 날씨가 부풀어 오른 5월, 나도 부푼 희망을 안고 찾아간 서핑샵에는 아무도 없었다. 홀로 닫혀진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즐비해 있는 서핑보드와 서핑슈트를 구경했다. 그러다가 닫혀진 문 틈으로 보이는 서핑샵 내부를 관찰했다. 길다란 테이블 뒤에 위치한 커피머신과 싱크대. 그 위에는 숏보드가 걸려있다. 숏보드 데크 위에는 아름다운 여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길다란 파마머리, 말벌이 날고 있어도 깜짝하지 않을 만큼 크게 뜬 눈동자, 웃지 않고 있지만 왠지 좋은 느낌을 선사하는 다물어진 입술. 화가를 알 수 없지만 분명 저 그림만큼 아름다운 여성이 그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테이블 앞에 길게 위치한 의자. 그 의자도 롱보드를 재활용해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곳곳에 놓여 있는 캠핑의자들. 싱크대에서 두 걸음 더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에는 누군가의 숏보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기분이 좋을 때 나는 향기를 맡고 있었다. 그 향기는 나의 환상 속에서 만들어낸 향기일수도 있고, 바다의 짠내가 잘 배어져 있는 건물에서 나는 향기일 수도 있다. 5분 뒤 전화를 걸었다.
"저번에 전화 한 번 드리고 오늘 등록하려도 왔는데 문이 닫혀 있네요."
"아, 네. 저희가 쉬는 날이 없는데, 일요일만 오후에 문을 엽니다. 혹시 오후에 다시 오실 수 있나요?"
"아.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다음주에 다시 오겠습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면서 마음 속에 점찍어두었던 다른 서핑샵을 찾아가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왜일까? 나는 그냥 다음주에 이 서핑샵에 다시 오겠다는 마음을 먹고 돌아갔다. 전화 통화를 한 강사의 목소리가 좋아서일까? 아니면 서핑샵의 인테리어가 맘에 들어서일까? 아니면 그냥 귀찮아서?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이유를 만들고자 하면 만들 수 있지만, 나는 이유를 만들지 않았고 정확이 다음주 토요일에 재방문했다. 그 날은 비가 오고 있었고 파도는 1m가 넘었다. 비바람을 맞으며 도착한 곳에는 젊은 남자 강사 한 명이 내가 저번 주에 봤던 서핑보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오늘 처음인데 등록하러 왔습니다."
"전화로 설명을 드렸지만, 월회원으로 등록하시면 주말마다 나와서 1시간 강습을 받으시고 자유서핑을 하실 수 있습니다. 강습이 없는 날에도 자유서핑을 하실 수 있습니다. 주말반으로 하시겠어요?"
"네. 저는 일단 주말반으로 하겠습니다. 오늘 바로 강습을 받을 수 있을까요?"
"네. 슈트 갈아입고 나가시죠."
강사와 함께 바다로 걸어가는 길. 바다에는 수많은 서퍼들이 있었다. 저 수많은 사람사이에서 어떻게 강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바다에 틈이 없었다. 숲을 하늘에서 바라보면 나무만 보인다. 숲 사이에 있는 곤충들과, 토끼, 새, 이름 모를 꽃들은 보이지 않는다. 서퍼들이 많은 바다도 그렇다. 바다가 보이지 않고 서퍼들만 보인다.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요. 강습이 될까요? 파도도 너무 높아요."
"저를 한 번만 믿고 따라오시죠. 죽도 쪽(백사장 왼쪽 끝 방면)으로 가면 파도가 작고 사람이 많이 없습니다."
그렇게 강사와 나는 첫 강습을 하러 걸어갔고, 지금까지 인연이 되어 얼굴을 가끔 본다. 그날 나는 어쩌다 보니 1:1 강습이었고, 아무리 빽빽하게 다른 서퍼들이 있어도 그날은 강사와 나, 두명이 주인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