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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Aug 13. 2022

다 좋을 수는 없지 않은가?

산골 일기 열일곱 번째

집을 지으면서 땅 다짐이 좋고 배수도 좋은 석질 토양으로 

토목공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을 무척이나 다행스럽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원에 나무를 심으려니 석분과 바위들이 섞인 땅은 

땅파기의 어려움은 물론 정원수의 생장에 결코 좋은 땅이 아니었다. 

집을 지을 때는 좋다고 생각했던 장점이 뜨락을 꾸미면서 결정적인 단점이 되었다. 

나무를 심으려 잘 파지지 않는 땅을 투덜거리며 파다가 나는 

나의 얄팍함에 그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땅 다짐이 좋다고 웃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불만 가득한 투정만 늘어놓고 있다니! 

조그마한 일에 일희일비하는 나란 녀석은 언제쯤 철이 들려나?      


시골에 와서 새삼 느끼지만 모든 면에 다 좋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것에는 다 양면성이 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또 다른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유보해야 한다. 

자기 관점에 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도시나 시골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지만 

시골에서는 그간 알고 있었던 상식이나 통념이 뒤집히는 반전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정원을 가꾸는 입장에서는 들풀들이 잔디밭을 침범하는 귀찮은 침입자에 불과하지만 들풀 입장에서는 기형적으로 번성하고 있는 잔디가 

어리둥절하고 생경한 존재일 것이다. 

무성한 잔디와 그 곁을 맴도는 들풀들을 보고 있으면 

문득 황대권의 수필집 ‘야생초 편지’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이 선생님은 상추, 들깨 등 재배 채소를 중히 여기고 그것 한 포기 살리기 위해서 

주변의 야생초들을 깔아뭉개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하시는데 나는 그것이 못 마땅해서 

번번이 제동을 걸지. (중략)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야생초 사이에 상추가 나면 오히려 상추를 뽑아 버리는데 

이 선생님은 주변의 야생초들을 뽑아 버리려 하니 내 속이 편하겠어?’     


생각의 관점에 따라 사물의 경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생각하며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난다. 

마이클 폴란은 그의 저서 ‘세컨드 네이처’에서 잔디밭을 가리켜

 ‘독재정권에 억눌린 자연’이라 묘사했다. 

질서 정연한 잔디밭은 인간이라는 독재에 억압된 모습일 뿐, 

자연 속에는 그런 강제적인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종의 번성을 위해 다른 모든 종이 멸절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보기 좋게 가꿔진 정원이나 꽃밭에 대해 


‘꽃밭이 초원 쪽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초원이 집 쪽으로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쳐들어온다.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여름이 지나기 전에 

숲과 정원의 경계는 무너져버리고 말 것이다’라는 표현으로 

인간이 가꾸는 정원이란 자연과의 무모하고도 치열한 싸움터라고 정의했다.   

   

얼마 전 일이다. 

대문을 열고 나가다가 푸른 비늘이 서늘한 유혈목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 

가족들이 질겁할 것을 생각하며 곧바로 농약가게로 달려갔다.      


“집에 뱀이 나와 그런데 퇴치제 하나 주세요”

“아이고 많이 놀랐겠네. 특별한 퇴치제는 없는데 여기 살충제를 뿌려두면 

그 냄새가 싫어서 뱀이 안올끼구만은”     


퇴치제를 원하는 내게 농약상 주인은 역한 냄새가 나는 살충제를 권했다. 

우선 급한 마음에 그 살충제를 사들고 집에 돌아와 울타리 가로 촘촘하게 뿌렸다.

다행히 그 이후로 뱀을 다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살충제의 여파였는지 데크며 화초 끝에 매달려 귀염을 떨던 

청개구리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아뿔싸. 살충제를 너무 많이 뿌렸나 보다. 

뱀에 놀란 나머지 아무 생각 없이 살충제를 마구 뿌려댄 나 자신이 못내 아쉬웠다. 

살충제의 양면성을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살충제가 갖는 양면성과 반대급부를 가늠해 보았을 텐데. 지금은 많은 고민과 공부 끝에 뱀이 출몰할만한 곳에 나프탈렌을 걸어 두었다. 

그 자극적인 냄새가 원치 않은 불청객들을 막아 줄 것이라 기대하면서...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 효과가 제법 괜찮다.      


살아내야 하는 매일의 삶을 엄밀히 따지고 보면 

매 순간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의 연속이다.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을 것인가 짬뽕을 먹을 것인가 라는 작은 선택에서부터 

투자와 관계를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것들까지 우리는 매 순간 무언가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들이 쌓여 한 사람의 인생이 정의된다. 

그런 면에서 인생은 모래시계와 같다. 

시간의 모래가 사라져 가는 만큼 등가의 결과가 쌓이는 것이 인생이다. 

시간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써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 무게를 결정짓는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러니 삶의 양면성을 들여다보는 통찰과 자기 성찰 그리고 관점의 유연성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직선적인 삶에 익숙했던 도시에서는 딱 부러진 자기 의견이나 주장이 

선명성을 드러내는 척도가 되고 한 사람의 능력치로 환산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그런 선명성보다는 조화의 여유가 더 소중하다. 

자연이 누구나 안기고 싶은 넉넉한 품이 되는 것은 

아마도 그 안에 넉넉한 균형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명함보다 유연함이야말로 자연과 함께 하는 시골 생활의 핵심가치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가능하면 더 이상 삶의 양면성 앞에 투덜거리는 습관을 멈춰야겠다. 

뜨락에 나무를 심으려 땅을 팔 때마다 여전히 돌투성이 땅이 힘겹지만 

이제 그만 힘겹다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앞 뜨락 울타리 옆에 심은 동백은 황량한 겨울 동안 붉은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고, 

그 옆에 심은 수양매화는 이른 봄 희디 흰 꽃을 선물할 것이다. 

남향에 심은 은목서는 은은한 향기를 품어낼 것이고, 

집 경계선에 심은 산수유는 봄의 전령이 되어 줄 것이다. 

때를 따라 피어날 꽃들을 생각하면 이만한 땀방울 정도야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리 생각해야겠다.     


나는 오늘도 작게나마 깨달은 편린을 따라 소소한 불편함을 긍정해 보려 애쓴다. 

아직 수양이 덜 되어 쉽지는 않지만 

그 불편함이 불편함 만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물론 반대로 아무리 좋은 것들도 반드시 감내해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도 가늠해 본다.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매일을 일희일비하기에 자연이 너무 깊다. 

시골에 와서야 나도 조금씩 철이 드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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