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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Aug 25. 2022

너무 똑똑해서 갇혀 지내는 거야

산골 일기 스물네 번째

  

”저 곰들이 왜 여기 갇혀 지내는지 압니까? “

반달곰의 생태를 설명하던 안내자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자연에 적응하지 못해서 아닙니까? “ ”적응 훈련이 덜 돼서 그런 거 아닙니까? “ ”유난히 소심한 성격 때문 아닌가요? “ 라며 자기의 생각을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든 대답 뒤에 그가 들려준 정답은 뜻밖이었다.


”저 곰들이 갇혀 지내는 건 너무 똑똑해서랍니다. “     

 

반달곰을 지척에서 볼 수 있다는 지리산 깊은 자락 의신마을을 다녀왔다. 흐드러진 벚꽃터널로 유명한 십리 벚꽃 길을 한참이나 지나 골을 타고 들어가면 숲과 계곡이 적당히 어우러진 아늑한 마을이 의신마을이다. 

이 마을은 방사에 실패한 반달곰들을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아름아름 입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실제로 흰 반달이 가슴에 선명한 곰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거친 야생의 기운이 훅 밀려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근데 왜 똑똑한 곰이 우리에 갇혀 지내는 거죠? “

안내자의 예상 밖 대답에 궁금했던 사람들이 물었다. 그 물음에 대한 안내자의 설명은 이랬다. 지리산의 반달곰은 방사하기 전에 야생적응훈련과 함께 사람 회피훈련을 같이 한다. 그중 회피 훈련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곰을 자꾸 괴롭혀서 곰의 뇌리에 ‘사람을 만나는 건 좋지 않아. 피하는 것이 좋아’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다. 곰에게 그런 기억이 자리 잡으면 그때 방사하게 되는데 개보다 후각이 사십 배나 더 발달한 곰은 제 스스로 인적이 빈번한 등산로를 피하게 된다. 따라서 지리산에서 사람이 곰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으며 간혹 곰을 보았다는 사람의 열에 아홉은 불법 약초꾼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방사 곰 중 일부 영악한 곰들은 회피훈련을 망각하고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얻고자 등산로로 접근한다. 이때 사람들이 먹이를 주면 그 곰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면 먹을 것이 생긴다.’는 새로운 기억을 갖게 되고 그렇게 익숙해진 곰은 배고플 때마다 등산로를 어른거리게 된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 더 대답해진 곰들은 인가로 내려와 부엌이며 장독간을 뒤지는 일도 서슴지 않아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고 만다. 

그렇게 익숙해진 곰은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 힘겨운 먹이사슬을 이어나가려 하지 않는다. 결국 그 곰은 포획되어 자유와 생존의 편안함을 맞바꾼 어쩌면 가장 비극적인 삶으로 자신의 전 생애를 마감하고 만다.     

 

우리에 갇힌 곰을 보고 있으니 다른 곰들과 달리 인간에게서 먹이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그 곰의 똑똑함이 평생 갇혀 지내야 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살면서 잘못된 지식이나 이단의 

길에 빠져 인생을 허비하거나 허우적거리는 사람의 공통적 원인이 바로 그 똑똑함 때문인 것을 수차례 봐왔기 때문이다. 특별히 자신만 깨달았다는 지식이나 지혜의 틀에 갇혀 보편적 진리와 일반적인 상식을 외면하는 

사람들, 소위 말이 통하지 않는 꽉 막힌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깨달았다고 하는 

작은 지식의 창살 안에 갇힌지도 모른 채 드넓은 세상의 자유를 외면하며 살아간다. 마치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 나온다 라는 작은 지식에 사로잡혀 대자연을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린 반달곰처럼.     

   

사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점과 같이 작은 지식을 가지면 

아는 것이 점이니 점 밖의 세상은 모르는 것이 된다. 이제 그 점이 커져서 직경 5센티미터의 원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아는 것은 직경 5센티미터의 원이고 모르는 것은 그 원 밖의 세상이 된다. 

이렇게 지식이 자라 점이 5센티미터의 원이 되었다는 것은 모르는 분야의 외접점이 커졌다는 것이므로 

다시 말해 모르는 것이 더 많아졌다는 의미가 된다. 그 원이 더욱 자라 50센티미터가 되면 외접점의 면적은 더욱 커지게 되고 모르는 미지의 영역도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니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이 지식의 역설일 것이다. 


커피를 배우면서 ‘커피는 쓴맛이야’라는 키워드 하나만 알던 수준을 벗어나 커피의 산미, 향기, 초코 레티 한 

다양한 맛을 느끼며 커피의 세계가 내게 얼마나 커졌던지. 당시 친구이기도 했던 커피 강사가 귀하게 구한 

천연 ‘루왁’ 한잔을 건넨 적이 있었다. 커피 맛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뭐 쓰기만 하고 무슨 맛인지? 

나는 믹스커피가 제일 맛있어! “ 라며 친구를 당혹게 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어느 고급 커피점에서 한잔에 35만 원을 호가하는 루왁 가격표를 발견하고 그 친구에게 얼마나 미안했던지. 이제 제법 커피 맛을 알게 되어 만일 다시 루왁 한 잔을 건네받는다면 아마도 사뭇 경건하게 한잔을 음미할 듯싶다.   

”친구야! 그때 내가 너무 무식해서 무례했었다. 정말 미안하고 미안하다 “ 나중에 친구에게 사과하며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수준을 알지 못하면 그 수준이 전부인지 

알아 교만해지기 십상이다. 피해야 할 일이다. 알면 알수록 커지는 지식의 외접점을 생각하면 겸손해져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나는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의신마을에서 내가 가진 얄팍한 지식에 갇혀 세상을 평가하고 사람을 재단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반추해 보았다. 편한 길, 지름길만 찾아 인생의 여정을 참을 수 없는 얄팍함으로 채우고 있지는 않았는지 지난날들을 더듬어보았다.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줄어들어가는 사람들과의 교류, 경청하기보다는 할 말이 훨씬 더 많아진 상황들, 작디작은 경험과 지식을 기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편협함이 늘어가는 것을 생각한다. 

그로 인해 조금씩 완고해져 가는 마음의 경도(硬度). 짙어가는 팔자주름만큼 굳어가는 표정을 풀고 이제라도 허허 웃으며 살아야겠다. 우열을 구분하고 평가하여 구분하려는 못된 습관을 벗어버려야겠다.   

  

어쩌면 평생을 제도와 조직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지냈고, 사람들을 그 울타리에 가두며 지냈는데 이제라도 훌훌 털며 살아야겠다. 의신마을의 반달곰으로 남은 삶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내 남은 생이 잘나고 똑똑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기억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냥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마음이 자유롭고 유연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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