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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Aug 16. 2022

도시 나들이

산골 일기 열여덟 번째

자연스러움과 흐트러짐의 차이가 한 끗이다. 

시골에 든 지도 어언 두어 해가 넘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여유와 흐트러짐의 경계에서 헤매는 날이 많다. 

쉬엄쉬엄 하고 싶은 만큼만 하지하는 여유를 부리다가도 

게으름에 흐트러지는 것은 아닐까 싶어 화들짝 놀라기도 하는 것이다. 

날이면 도시의 치밀한 직선의 공간과 분주함으로 가속된 매캐한 냄새가 그립기도 하다. 잠시나마 와글와글한 번잡함 가운데 서서 삶의 치열한 향기라도 맡고 싶어 진다. 


이런 마음이 어쩌면 일상의 단조로움에 물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런저런 일로 나서는 읍내 나들이는 막힌 숨이 트이는 콧바람 같다. 

무료하던 참에 일이 있어 나서는 길이나 누군가 불러주어 나가게 되는 일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마음을 들뜨게 한다. 

부모를 따라 어쩔 수 없이 시골 살이를 하게 된 막내 녀석에게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한 시간에 한 번 오는 마을버스를 타고 나가봐야 조그마한 찻집에 들러 

차 한 잔 마시는 것이 고작일 텐데 순례라도 떠나듯 나서는 걸 보니.     


나는 아직 도시의 습관들과 이별하지 못한 것 같다. 

얽힌 관계의 피곤함을 떠나왔지만 때로는 그 관계 속에 얽힌 사람의 향기가 그립다. 

혀끝에 남아있는 도회의 입맛에 대한 갈증은 또 어떤가! 

평소에 그리 즐긴 것도 아닌데 미치도록 햄버거나 피자, 치킨이 당기는 날이 있다. 

한가로움을 깨우는 자극이 필요하듯 시골의 순한 맛을 상쇄시킬 

알알함이 절실한 순간이 있다. 

그래서 가끔은 ”오랜만에 시내 나가 햄버거 한번 안 드실라우?“ 하는 

아내의 말이 얼마나 치명적인 유혹인지!  

”여보. 시내 나간 김에 치킨 한 마리 싸갈게요. “ 

이보다 사랑스러운 말이 또 어디 있을까? 

내 마음은 여전히 시골에 머물러 있지만 ‘그까짓 햄버거 한 트럭을 갖다 줘도 

이 구수한 된장국 한 그릇과 안 바꿔!’ 아직 나는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간혹 이런저런 핑계를 이유로 콘크리트 빌딩 숲으로 나들이를 나선다. 

분주하게 거리를 걷는 사람들, 즐비하게 늘어선 형형색색의 간판들, 

쉴 새 없이 오가는 차량들을 보고 있으면 살아가는 치열함이랄까? 생동감이랄까? 

그런 강렬한 기운이 느껴진다. 

무슨 일이 그리 중하여 모두들 저리 잰걸음인지 모르지만 

도심의 카페 창가에 물끄러미 앉아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하루 종일 사람들 코빼기도 보기 어렵다가 물결처럼 흘러가는 군중을 대하는 일은 

무료한 일상의 상처에 붙이는 반창고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도시 나들이가 주는 기쁨은 여느 때처럼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익숙했던 습관의 향수를 채우고 나면 그만이다. 

반창고를 붙인 상처가 이내 아물듯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다툼의 상처를 입고 나서야 평화의 가치를 아는 것처럼 

물린 것만 같았던 한적한 시골 풍경이 이내 마음에 차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볼일을 마치면 서둘러 돌아갈 채비를 한다. 


그런데 도시로 나와 사람 구경을 하면서 문득 깨닫는 것은 

도시에서 웃는 얼굴 보기가 정말 어렵다는 사실이다. 

잰걸음을 놓는 거의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다. 

어쩌면 치열한 경쟁을 질주하는 곳에서 그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웃으면서 달리기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상황에서 웃음을 만들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가면이라도 쓴 듯 한결같이 무표정하다. 

그 무표정마저도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페르소나이겠지만 

자기 달리기에 열중하는 사람들에게는 웃을 틈이 전혀 없어 보인다. 

무표정한 군중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나운 표정으로 으르렁거리며 살기보다는 

순한 표정으로 ‘조금 뒤처지면 어때?’ ‘조금 낮아지면 어때?’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진다. 

일 인분을 초과하는 분량을 쌓아놓고 천박한 과시를 드러내며 살고 싶지도 않고, 

생활의 탁류에 잠긴 무채색의 표정으로 살기는 더더욱 싫다. 

그래서 도시에서 볼일이 끝나면 바쁘게 잰걸음을 놓는 사람들의 거친 기운에 

전염될까 하여 빠르게 시골집으로 돌아가려 애쓴다. 

혹시 남보다 앞서 가려 저리들 치열하게 사는데 

느릿느릿 걷는 시골의 삶이 과연 온당한가?라는 질문을 타고 들어오는 

조바심이라는 요물이 마음을 움켜잡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삶의 치열함이 시골이라 한들 예외가 있겠는가? 

풍경이 한적하다 해서 시골의 삶이 한적한 것은 결코 아니다. 

눈에 드러나지 않을 뿐 시골의 삶에도 살아내야 하는 치열함에는 도시와 다를 바 없다. 이곳에도 생존을 걱정하는 고민과 근심과 염려가 항상 도사리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도시 나들이는 삶의 치열함에 대한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자극적인 풍경이 된다. 

시골 풍경에 익숙했던 밋밋한 습관들을 자극하여 깨우는 역할을 한다. 

그래 봐야 무슨 대단한 결심이라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사실 시골 살이는 도회적인 생활 습관만 내려놓으면 도시만큼 생활비용이 들지 않는다. 큰 욕심 없이 ‘조금 벌고 조금 쓰지’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이다. 

굳이 질주의 경기장에 들어서지 않아도 삶의 날들이 흘러간다. 

그렇다고 삶을 분투하는 마음마저 내려놓으면 

도시에서처럼 무료한 뒷방 늙은이가 되기 십상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삶의 분투를 가시적인 유형적 성과에 초점 하지 않아야 

소박한 자연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유형적인 성과만이 진정한 성과이고 

그 성과의 크기를 성공의 크기로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돈과 명예와 권세라는 유형의 성과만이 

한 사람의 삶을 재단하는 가치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시골 살이를 통해 한 순간 누린 마음의 평화, 고요함, 소박한 정, 그리움, 

작은 뜨락이 주는 만족감, 대숲에 떨어지는 빗소리, 흔들리는 바람소리, 

산 너울을 스쳐 지나가는 흰구름, 새롭게 돋아난 작은 꽃송이 하나가 주는 

경이로움은 돈과 명예와 권세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런 느낌과 정서의 누림은 그간 살아오면서 받은 

몇 개의 기념비적인 표창장이나 공로상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잠시나마 나를 우쭐하게 했던 그것들은 이제 와서 새삼 의미 없는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하지만, 

지금 이렇게 자연 속을 거니는 작은 순간이 내 인생에 주어졌다는 것만으로, 

이 평화로운 한 때가 내 삶의 일부를 채우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충분히 성공했고 충분히 행복하다. 


모든 은퇴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도시의 아파트 숲에서 은퇴하지 말라고! 

도심의 정글 속에 남겨진 삶을 방치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도시에서 얻는 생활의 편리함과 근린에 있는 편의시설이 주는 작은 이익은 

시골에서의 소박한 가난에 결코 비교할 수 없다. 

도시의 편리함과 풍요는 그리워질 때 한 번쯤 나가서 감상하고 누리면 그만이다. 

사실 요즘은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다. 

온라인을 통해 시골에서도 얼마든지 최첨단 콘텐츠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후미진 시골 어디에서도 도시와 똑같이 최신 음악을 듣고 멋진 그림을 감상하며 

최고의 토론과 이론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간혹 시골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니 이 양반이!’하며 그 지식의 해박함에 종종 놀라곤 한다.     


인생의 2막 준비에는 반드시 귀천(歸天)에 대한 생각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는 지각없이 태어났지만 돌아갈 때는 돌아갈 길을 생각해야 한다. 

시작과 끝이 우리 소관이 아니지만 끝을 어떻게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그런 면에서 도시는 귀천을 준비하는 장소로 적합하지 않다. 

하늘로 돌아가는 길은 자연을 닮은 소박한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성과 소멸의 순환이 반복되는 자연에 익숙해지면 소멸이란 것이 결코 두렵지 않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여정인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조차도 초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 초월의 담담함이 자연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커다란 은혜요 혜택이다. 

그러니 나이 들면 그만 시골로 내려오시는 것이 맞다. 

그대 욕심만 내려놓을 수 있다면 말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 생각이지만...     


더 누리고자 하는 욕심은 시골에 뿌리를 내리고 

간혹 도싯 바람을 느껴보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마음을 다독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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