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솔 Aug 18. 2022

경계 세우기

산골 일기 스무 번째

울타리 공사를 했다. 

울타리가 없으니 바람이 휑하니 들어온다는 핑계가 있었지만 

사실은 경계를 구분 짓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울타리를 치고 나니 소위 나의 소유가 분명해진다. 

내가 가진 땅의 경계,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선명해진다.

 어쩌면 나는 그 소유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골에 들어와서는 구분 짓고 경계를 만들고 한계를 만드는 일은 그만하자 싶었는데 

관습의 깊은 뿌리는 늘 구분하여 제 것의 경계를 알고 싶어 한다.        


어느 날 문득 눈을 들어 보니 사방에 둘러쳐진 울타리에 갇혀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시골에 들어와서도 본능적인 충동에 따라 애써 이웃과 경계를 쌓고 있는 내 모습. 

도시에서 평생 단절된 담벼락을 세워 두고 살았는데 그 관습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길과의 경계에는 홍가시를 심었고, 집과 집 사이의 경계에는 남천을 심었다. 

그리고 서쪽 끝 단애에는 높은 축대와 함께 나무 펜스를 둘러쳤다. 

사방을 모두 틀어막는 나의 울타리 쌓기는 주차장과 뜨락을 구분 짓는 

경계가 완성되면서 일단 끝이 났다. 

아니 아직 멀었을지도 모르겠다.

 옆집의 시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남천 옆에 조금 높은 울타리를 치자는 

아내의 성화가 있고 보면... 

아무튼 나를 둘러싼 울타리들은 내 것과 네 것을 명확히 구분 지어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나의 습성을 그대로 드러낸 꼴이 되었다. 

시골에 들어와서는 서로 간 경계를 허물고 구분을 없애며 살자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여전히 열심히 울타리를 치며 살고 있다.     


어차피 땅이란 것이 애초부터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공간인데 

우리는 집요하게 땅의 소유에 집착한다.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자기 소유라는 명목으로 잠시 맡겨진 곳이 

땅이라는 공간일 텐데, 우리는 그것을 더 많이 갖기를 열망하고, 

소유의 경쟁 욕심을 동력으로 부를 축적하려 한다.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가격을 붙이고 흥정하고 

자신의 소유로 정하기 위해 이전투구한다. 

하지만 누대에 걸쳐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은 땅 그 자체이고 

인간은 그 위를 잠시 스쳐가는 나그네에 불과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유의 경계에 민감하고 경계의 침해에 분노한다. 

때로는 경계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인간관계마저 파괴시켜 버린다. 

늘 다니던 마을길이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땅주인에 의해 

하루아침에 통행할 수 없는 길이 되기도 하고, 남의 땅에 터 박기를 하고 눌러앉아 

제 땅인 양 행세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렇게 얻어진 금전적 이익이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을 공중 부양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경계에 대한 이득을 사람의 가치보다 우위에 두는 인간들은 정말 추하다. 

나는 그런 사실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나의 소유를 구분하는 경계선 긋기에 여념이 없다. 

혹자는 울타리가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는 방어막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울타리가 어찌 외부의 적을 막아주는 무기가 되겠는가! 

울타리는 단지 ‘여기서부터는 내 것이니 함부로 들어오지 마!’라는 

위협의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귀촌을 결심하고 나는 삶을 함께 나눌 이웃을 열심히 찾았었다. 

낯선 시골에 홀로 들어가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소박한 정을 나눌 이웃도 절실했다. 

그렇게 해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이웃들과 함께 집을 짓고 시골에 정착하게 되었다. 

시골에 정착하면서 우리는 신뢰의 약속으로 울타리의 경계를 허물어 

각 집으로 이어지는 소로를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길이 연결되면 손익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날들도 

쉽게 건져 올릴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우리의 바람대로 집과 집을 연결했던 그 길은 서로의 대소사가 넘나들고, 

음식과 정을 나누는 통로가 되어 주었다. 

덕분에 우리의 삶은 관계의 윤택함을 통해 한 뼘은 더 행복해졌다. 

더불어 짐을 진다는 것이 얼마나 많이 삶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는지 

그때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길을 걸어본 많은 사람들은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 보려는 우리를 칭찬했고 우리는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아~ 나도 경계를 허물며 함께 할 수 있는 이웃이 있었으면 좋겠다. “ 

그런 부러움을 담은 탄식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하지만 우리의 통로는 지금 다시 막혀 버렸다.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담장 너머 이웃이 되고 말았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감정도 엔트로피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잠시 한 눈을 팔고 나면 무성한 잡초에 뒤엉켜 뜨락이 

혼돈스러워지는 것처럼 우리의 관계와 감정도 그런 것이었다. 

소중하고 귀한 것일수록 방치하면 무질서도가 커져서 

마침내는 더 큰 폐허가 되고 만다. 

이타적인 선한 감정은 정성을 다해 키워가는 것이지 

절로 이루어지는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랑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사랑한다 말하고 사랑한다 표현해야 사랑이 자란다. 

가만히 있으면 사랑도 자라지 않는다. 

자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생각하지도 않은 오해와 미움과 무관심의 잡초가 

사랑보다 무성하게 자라 오른다. 사랑이 가려져 보이지 않을 만큼.      


서로를 향한 감정이 자라지 못하자 다시 집과 집을 연결하는 통로는 사라지고

 울타리의 경계가 두꺼워졌다. 무관심의 잡초가 무성해졌다. 

더불어 서로의 이해타산에 대한 날카로운 셈이 살아났다. 

그리고 그 셈법이 날카로워질수록 서로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더욱 선명하게 굵어졌다. 그렇게 경계선이 굵어지면서 우리의 감정은 어쩔 수 없이 

관성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마치 기울어진 경사면을 굴러가는 구슬처럼. 

이성적 판단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만 이미 비탈을 굴러 떨어지고 있는 감정의 구슬은 끝없이 떨어져 내릴 뿐이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감정의 기울기가 반대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 시점을 민감하게 

느끼지 못한 무관심이었다.      


다시 막힌 울타리 안에 서서 나는 울타리를 허물 날이 올까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마음의 울타리를 어떻게 허물까를 고민한다. 

감정의 경사를 굴러 떨어져 내린 미움이나 불신의 감정을 어떻게 털어낼 수 있을까? 

뜨락에 서로 경계를 내어 주며 어우러진 동국과 구절초를 바라보며 나는 상호 호혜의 

셈법이 아닌 희생을 통해서만 인간관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군가 손해를 감내하는 희생을 감당할 때 인간관계가 아름다운 균형을 회복한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희생을 감당하는 사람의 인생이 손해인 것 같지만 

나는 그것이 결코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온 그 사람의 인생의 무게는 남의 희생을 딛고 누린 사람보다 

비교할 수 없이 무거울 테니까!      


아~ 나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경계를 허물 듯 울타리를 부수고 

그렇게 교류하며 사랑하며 자연을 닮아가고 싶다. 

내어주고 내어주어 비로소 숭고하고 아름다워지는 그루터기가 되고 싶다. 

소유의 경계를 포기하고, 마음의 구분을 지워내고, 자연이 그러하듯이 

부드럽고 넉넉한 마음으로 절로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운 경계가 생기도록. 


짧디 짧은 한 인생을 애써 마음을 뾰족하게 가다듬어 

경계선을 그으며 살 이유는 없지 않은가! 


작가의 이전글 흑묘백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