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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Aug 31. 2022

역지사지의 재미

산골 일기 스물아홉 번째

”내 땅 가지고 와 이래라저래라 카노! “


그 어르신의 카랑카랑한 고집을 꺾을 사람은 없었다. 마을 진입로는 차량이라도 마주치면 서로 곤란할 지경

으로 좁았지만 그 누구도 길을 넓힐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곳 병목구간을 지나면 여유로운 교행이 가능한 

탁 트인 길이 이어지니 사람들의 불만은 날로 더했다. 하지만 어르신은 충분한 보상금도 마다하고 그 땅을 

꽁꽁 움켜쥔 채 마을의 불편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평생을 붙여먹은 땅에 대한 애착이 한편 이해가 되지만 농사지을 여력이 없어 묵히면서도 땅을 내놓지 못하는 어르신의 고집이 안타까웠다. 자투리땅을 조금만 내 

놓으면 길이 시원하게 뚫릴 텐데... 


”어르신이 돌아가시고 나야 길을 낼 수 있을끼구만“

마을 사람들은 오늘도 불만을 꾹꾹 눌러 담으며 그 길을 지난다. 


시골에 와보니 비단 그 어르신뿐만 아니었다. 마을에 오래전부터 터를 잡은 어른들의 세계관에는 우주의 중심이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낳고 자라고 늙어가며 평생을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라 이해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답답할 때가 있다. 당신들이 익숙하게 해온 방식대로만 고집하며 새로운 변화를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 마을 앞까지 수도관이 설치되어 있지만 마을은 여전히 오염의 위기에 놓인 관정의 물을 먹고 산다.  ”평생을 공짜로 먹었는데 뭐 하러 돈까지 내며 물을 사먹노?“ 마을 원로들은 물탱크를 청소하는 비용이며, 관정에서 물을 끌어 오느라 소모된 전기료며, 수관 보수에 들어가는 돈이 수도료보다 비싸다는 것을 

아무리 설득해도 마이동풍이었다. 덕분에 처음 마을에 이사 와서 나도 예외 없이 마을 관정 물을 먹어야만 

했다. 그러다 오염된 수관을 통해 유입된 이끼들로 세탁기며 정수기가 모두 고장 나고 나서야 희망하는 집만을 대상으로 수도관을 연결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여유로운 수돗물을 보면서도 마을 어르신들은 여전히 

넉넉지 않은 관정의 물을 사용하고 있다. 


시골은 도시와 달리 길하나, 물 하나 모든 공공의 인프라들이 공유와 양보로 이뤄지는 일이 많다. 생각을 조금만 넉넉히 가지면 서로 편안한 일이 많지만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틀어쥐면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수십 년을 같은 생활방식으로 살아온 분들에게 역지사지를 기대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시골 살이를 시작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최고의 덕목이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당연스러워졌다. 이리저리 이어진 두렁길처럼 인과로 얽힌 자연 속을 살아가는 아름다움은 언제나 조화로움 속에 있고 그 조화로움은 필연적으로 역지사지에서 출발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의 수많은 오해와 다툼과 반목은 얼마나 많이 줄어들 수 있을까! 하지만 이해타산이 얽힌 세상 

가운데 역지사지의 실현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내 목적과 이익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데 상대방 입장에 서서 나를 누그러뜨리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역지사지의 넉넉한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아마도 먼저는 무엇을 바라보느냐 하는 시선의 문제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필연적으로 이해득실이 상존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 손익의 교차점에서 무엇을 먼저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얻게 될 양지의 크기만큼 상대방이 떠안을 그늘이 얼마나 넓을지를 가늠해 보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얻을 이익보다 상대방이 잃을 손해를 먼저 가늠해 보고 그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을 객체화시키는 자세일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위대해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자신을 객체화시킬 줄 아는 능력’이라 한다. 동물은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지만 인간이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자기 객체화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스로를 객체화한다는 것을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거의 예외 없이 스스로의 머리를 쳐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이고 두야! 정신머리를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

”너 요즘 왜 그리 짜증을 부려? “

”아! 같은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다니 “ 


우리는 때로 자신의 머리를 치며 스스로를 질책하기도 하고, 자괴감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때리는 내가 진정한 난지, 맞는 내가 진정한 난지 헷갈린다.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를 분리하여 되새길 줄 아는 존재다. 흔히 철들었다는 의미는 어쩌면 자신과 대화할 줄 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 말일 것이다. 철들지 않은 사람들의 철없음은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반추해 보는 자기 객체화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욕심을 잘 내려놨어. 참 네가 대견해. “

”용케 잘 참아 내고 견뎌냈구나! “

”그때 너무 거칠게 얘기했어. 부드럽게 얘기해도 됐는데... “ 


철든 사람은 자기 행동을 반추하며 거기에 새로운 평가를 덧입힐 줄 안다. 역지사지가 바로 그 마음이다. 

자신의 행동이나 말의 경중과 정당한 정도를 되새겨 볼 줄 아는 것이다. 그 반추와 되새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변화시킨다.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알아야 분별력을 얻게 되고 어제와 다른 오늘의 변화를 누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그릇됨이나 정당하지 못함에서 돌이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세 번째는 이익의 범위를 자신에 국한된 범위에서 전체의 범위로 넓히는 시야의 확장이다. 역지사지의 걸림돌이 결코 이익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익의 포기 관점이 아닌 이익의 범위 관점으로 생각의 지평을 넓혀 보는 것이다. 바라보는 시야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으냐에 따라 우리의 결정도 사뭇 달라질 것이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넓은 시야로 보면 잔잔한 구역과 폭포처럼 위험한 구역을 살펴 미리 대비할 수 있지만 시야를 좁혀서 보면 갑자기 나타나는 폭포에 대비할 길이 없다. 좁게 보면 손해 나는 일도 넓게 보면 장기적인 이익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역지사지는 전체의 이익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전체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내 것을 내어 주는 마음. 더불어 사는 행복은 포기 속에 얻어지는 여유에서 다가온다. 


하념 자연이 그러하듯이. 


그 너그럽고 부드러운 속성을 닮아갈 때에 시골의 삶도 점점 아름다워져 간다. 가녀린 들꽃의 입장에서, 

저녁이면 창문을 기어오르는 청개구리의 입장에서, 작디작은 모든 것들의 입장에서 나를 그려보는 것. 

그런 순한 삶을 살아가는 재미를 누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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