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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Oct 04. 2022

탁류

산골 일기 사십육 번째

공연히 뒤틀린 심사로 인해 마음을 지옥으로 만드는 날이 있다. 자기 마음만 지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마음에도 지옥을 그려내고 마는 날이 있다. 마치 거친 탁류로 탁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마음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편린(片鱗)들로 인해 표류할 때가 있다. 그 상한 감정은 어쩔 수없이 급류가 되어 주변 사람들조차 휩쓸어 버린다. 그 냉랭함으로 사랑해야 할 사람들의 감정을 얼어붙게도 하고 불편하고 불쾌한 침묵으로 가라앉게도 한다. 그런 마음의 탁류가 일 때마다 형편없는 내 모습에 자괴감이 들지만 날씨의 변덕처럼 어쩔 수 없이 그런 순간들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 감정이라는 것이 그처럼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닐 때가 있다. 우울한 감정이 폭풍처럼 몰려올 때도 있고, 작은 오해들이 날카로운 감정의 예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예기치 않게 가려운 손이 닿지 않는 등판처럼 내게 일어난 감정임에 분명하지만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는 것이다.      


괴롭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감정의 괴물들을 잠재우지 못하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낼 수 없는걸! 내 의지와 다르게 찾아오는 우울감이나 마음이 닫히는 단절의 감정에 대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정말 오래도록 고민해왔다. 그 고민 끝에 깨달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공연히 감정이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운 날이면 ‘오늘 내 마음에 사나운 소낙비가 들었구나.’ 예기치 않은 일기의 변화처럼 감정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한때의 감정을 잠시 후면 지나갈 여름 소낙비라 생각하고, 그 소낙비가 지나고 나면 곧 밝은 햇살이 피어날 것을 믿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잠시 후면 지나갈 소나기에 자기감정을  싣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을까 싶어 진다. 마음속에 격랑과 탁류가 일 때마다 내 감정이 왜 이렇지 라는 의문보다 일기의 변화처럼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순간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둘째 그 지나가는 감정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탁한 감정이 생길 때 그 감정을 표출하고 표현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해 보는 것이다. 마치 버퍼에 걸린 것처럼 일시적으로 반응을 유보해 보는 것이다. 

숫자를 세도 좋고 긴 한숨을 쉬어도 좋다. 그 잠시의 간격이 중요하다. 감정이라는 것이 일단 표출되고 나면 그 반대급부로 때로 너무 큰 파괴적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선하고 밝은 감정이야 상관없지만 어둡고 습한 

감정을 성급하게 드러내는 것은 인간관계에 있어 절대 금물이다. 그런 감정의 표출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단절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꽤나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나 자신에게 5초간 침묵 규칙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상대방의 말이나 태도에 즉각적인 반응보다 마음으로 5초간 셈을 하고 반응하는 습관이다. 그렇게 반응을 유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감정이 싣지 않고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5초라는 짧은 시간의 효과가 사뭇 대단했다. 우리의 

기분이나 감정을 되돌리는데 때로는 5초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음을 알았다. 탁류와 같은 어떤 근심, 염려와 걱정이나 분노라도 시간이 가면 결국 가라앉게 마련이다. 우리에겐 항상 그 잠시 불필요한 삶의 부유물들이 가라앉을 시간의 여유가 필요하다.      


셋째 감정을 잠식시키는 국면에서 빠르게 벗어나는 것이다. 즉 감정이 더 깊은 골짜기로 내려 떨어지기 전에 물리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생각이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물리적인 환경이나 행동의 

변화가 역으로 감정을 변화시킨다. 우울해지려고 하면 그 우울함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노래를 부른다든가, 수풀에 이는 푸른 바람을 맞으러 산책을 나서는 것이다. 즉 환경과 상황적 국면전환을 통해 하나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바꿔보는 것이다. 시시각각 천변만화하는 자연이 하나의 상태 속에 계속 머물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도 그래야 함을 깨닫는다. 오래 고인 물이 썩어버리는 것처럼 탁한 감정 하나가 오래 마음에 고이면 필연적으로 깊은 오해의 악취를 풍기게 마련이다. 그러니 악한 감정이나 오해나 질시나 미움이나 시기나 탐욕과 같은 감정이 마음에 엄습해 오면 그런 감정들이 오래 머물지 않도록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애써 강제로라도 환경이나 행동의 변화를 통해 감정을 되돌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누구나 삶의 어려움을 만나고 감정의 깊은 골짜기를 경험한다. 바로 그때 왜 나만 겪는 일이라며 자신을 원망하거나 스스로를 괴롭게 할 이유가 없다. 누구나 살면서 만나는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게 마련이다. 

바로 그때 삶의 길목에서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어려움의 돌덩이들을 그저 묵묵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기치 않은 감정의 탁류도 시간이 가면서 점차 가라앉아 맑아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감정의 기복이 가라앉을 때까지 생각을 줄이고 감정의 진폭이 잦아들 때까지 스스로를 가라앉히면 반드시 감정의 기울기가 되돌아오는 순간이 다가온다.     


산다는 의미의 영어단어 ‘Live’의 철자를 반대로 하면 악(Evil)이 된다. 나는 악이란 결국 악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악한 감정이 나를 지배하면 ‘삶(Live)을 죽이는 악(Evil)이 되고 만다. 그 악의 결과가 바로 삶의 반대인 죽음인 것이다. 나의 행동이나 감정이 관계를 죽이고 있는지, 사람들의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앗아가고 있는지를 경계할 일이다. 악취의 근원이 부패한 쓰레기라면 악취라는 결과는 부패한 쓰레기가 원인이다. 마찬가지로 악한 행동은 악한 본질적인 생각에서 드러난다. 악이라는 것이 물리적인 행동만이 아닌 것이다. 범죄적 행위의 이면에 도사린 이기심, 질투, 투기, 탐욕의 어둠이야 말로 큰 악의 도화선이다. 그러니 경계할 일이다. 마음에 작은 그늘이라도 깃들지 않도록, 그 그늘의 어둠이 오래 머물지 않도록 마음의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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