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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Oct 07. 2022

어딜 바라보노?

산골 일기 사십구 번째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 관한 우화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자만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승리할 날이 온다는 교훈을 이보다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그래서 이 우화는 자주 인용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패러디를 낳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보면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패러다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천착하는 것은 아마도 상식을 뒤엎는 반전이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은연중에 약자가 강자를 뒤집어엎는 역전의 묘미에 열광한다. 그리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그 어떤 불가능에도 도전할 수 있다는 정신을 심어주기 원한다. 현실 세계에서 좀체 

일어나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최근에 나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또 다른 해석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거북이가 어떻게 이 불가능한 패러다임의 승리자가 되었는지를 통찰력 있게 꿰뚫는 말이었다. 

    

’ 토끼는 경쟁상대인 거북이를 보았고, 거북이는 목표를 보았다 ‘      


요즘 젊은이들이 명작을 일컬어 ’ 갓 띵작(신도 머리를 칠만큼 좋은 작품이라는 의미)‘이라 부르는 것처럼 실로 ’갓띵문‘이 아닐까 싶었다. 이 작은 문장에 담긴 통찰력은 내게 새로운 영감을 부어주었다. 삶의 미래를 어떻게 경영해야 하는지, 내 감정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준 것이다. 그동안 나는 내 인생의 여정보다 얼마나 많이 주변 사람들의 흥망성쇠에 내 감정과 시선을 담으며 살아왔던가! 평안히 잘 살다가도 나보다 조금 더 잘 나가는 사람을 보면 그만 현실을 비하하게 되고, 반대로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현실적 만족감에 빠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누군가와 비교하여 평가 우위이거나 열위로 인해 일희일비하며 삶의 방향성을 잃어버리곤 했었다.      


언젠가 사회복지 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참 괜찮은 청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회 복지기관이 그렇듯 그곳도 누군가를 돕는 사회공헌적 업무는 만족스러웠지만 급여는 박봉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하는 일의 숭고함에 비해 그곳 청년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나는 그 표정에 마음이 쓰여 이런저런 얘기 끝에 “혹시 대기업에 입사한 같은 또래 친구들의 급여와 비교되어 위축되지는 

않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상했던 답이 쏟아져 나왔다.      


“가끔은 이런 급여를 받으며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나 걱정도 되고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면 괜히 움츠러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 평가하여 스스로 불행을 자처하거나 뒤처져 있다는 열등감에 쌓일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경쟁상대가 아닌 목표만을 바라보았던 거북이의 이야기와 함께. 아마도 내 느낌이었겠지만 그 말을 들은 청년들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지는 듯했다. 자신의 일이 갖는 의미와 가치, 숭고함만을 바라본다면 더 많은 급여를 향해 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친구들보다 자신이 얼마나 더 소중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기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시골살이를 함께 시작한 마을 식구들과 작은 불편이 발생하는 때는 항상 하고자 하는 일의 궁극적인 목표와 가치를 바라보지 못하고 상대방을 바라볼 때임을 깨닫는다. 내가 가꾼 정원에 만족하다가 다른 집 정원에 좋은 나무라도 한 그루 들어오는 날에는 내 정원이 갑자기 초라해 보이기도 하였다. 자족하며 살다가도 나보다 조금 여유가 생긴 친구들의 넉넉한 일상을 마주치면 자족의 평강이 무너져 버리곤 했었다. 시골이 아닌 도시로 진출하여 집값이 껑충 뛰었다는 친구들의 소식을 들으면 괜한 부러움에 가슴이 쓰린 날도 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늘 남과 비교하여 자신의 위치를 판단하려는 속성이 있나 보다.   

   

각 나라의 행복지수를 보면 경제적으로 고달픈 삶이 뻔해 보이는 가난한 지역의 행복지수가 상상 이상으로 

높은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의 높은 행복지수를 분석한 어느 학자는 그들에게는 비교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이웃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밝히기도 말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뿐이니 자랑할 것도 열등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필리핀의 쓰레기 산에서 하루 종일 냄새나는 쓰레기를 뒤지면서도 웃음 가득한 사람들의 삶을 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들의 행복지수는 무척 

높았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밝은 웃음을 품을 수 있었을까?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이웃들에 대한 동병상련의 마음이 서로를 위로하고 다독이며 살아가게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나를 비교 평가할 수 잣대가 천차만별로 널린 세상을 살고 있다. 이곳 시골 환경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 옆에는 수 만평의 감 농사를 짓는 여유로운 대농(大農)도 있고 마을에는 소작 일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 그 부의 극명한 편차 속에 내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나의 내적 행복이나 평안이 극명하게 달라질 수밖에...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이 내 시선의 대부분이 항상 그 부농의 여유에 꽂혀 있는 날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나의 부족과 모자람이 도드라지곤 했다. 사람들에게는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목표를 바라보라고 호기롭게 조언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주변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평가하는 날이 많았던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더 이상 비교평가 속에 나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살다 보면 여유 있는 날도 있고 옹색해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 교차하는 일상의 변곡점에 내 걸음이 흔들릴 필요가 없을 터이다. 더 이상 다른 이의 삶을 기웃거리며 머뭇거리는 토끼의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비록 부족하고 모자라도 나만의 기쁨과 즐거움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 


비교 불행 속에 머뭇거리기엔 이생의 삶이 너무 짧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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