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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Feb 20. 2024

매화에 실린 봄

산골일기 육십 두 번째

간밤에 비 듣더니 아침에 매화가 피었다. 

겨울이 아직 지척인데 어느 안달 난 봄의 전령이 때 이른 파발을 띄운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겨울을 향하여 이제 그만 물렀거라고 으름장을 놓았을지도. 

뜨락엔 바람마저 숨 멎은 듯 고요하다. 

어쩌면 작은 흔들림조차 허용하지 않을 만큼 밤새 봄의 외침이 쩌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첫 꽃 이파리에 맺힌 빗방울이 초롱하다. 

오래 기다려온 연인의 치마폭이라도 끄는 것처럼.    

  

매화꽃 몇 송이가 피었을 뿐인데 이내 뜨락 가득 봄이 차오른다.      


언제나 물러날 것 같지 않은 날들은 그렇게 가고 와야 할 날들 또한 그렇게 온다. 

언 땅의 꽝꽝한 상처들도 그렇게 아물고 먼발치의 걸음도 그렇게 다가온다. 

나는 천지에 홀로인 듯 가만히 서서 적막한 꽃송이를 바라본다. 

언제나 그 자리에 피었던 것처럼 미동조차 없는 꽃잎 앞에 나도 바람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 봄이로구나. 

봄이 이렇게 오는 걸 나만 몰랐구나. 

뜨락에 연두 빛 가득해야만 봄인 줄 알았는데 봄이 이렇게 오는구나. 

그렇구나. 그렇구나. 넘쳐야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구나. 

많아야 메워지는 것이 아니었구나. 

여린 꽃 한두 송이로도 뜨락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왜 몰랐을까? 

꽃잎이 나인 듯 내가 꽃잎인 듯 생각이 피어나는 사이 마음속 겨울들이 슬그머니 뒷걸음치기 시작한다.

     

이제 며칠 후면 매화가 만발하리라. 

갈 빛 젖은 땅도 연두 빛에 물들어 올 테고, 나무 등걸에 갇힌 여린 순들도 껍질을 깨고 나올 터이다. 

바람이 지나는 캔버스마다 흩뿌려진 빛깔들이 서로 부딪칠 때마다 한바탕 요란한 웃음이 쏟아질 터이다. 

봄 벌들은 요란한 날갯소리보다 분주할 테고 모든 산하가 완전한 희망으로 바쁠 터이다.     

 

그 완전한 희망의 틈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문득 아직 두툼한 겨울 속에 갇힌 나를 바라본다. 

풀리기 어려울 거야, 깨뜨리기 힘들 거야 그렇게 미뤄든 마음 밑바닥의 짐들을 이제 다시 꺼내봐야겠다.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그 꽝꽝한 얼굴들에 다시 시선을 맞춰야겠다. 

겨울도 이리 가는데 두려울 것이 무언가? 

완전한 희망의 계절이 여리디 여린 매화꽃이파리 몇 장으로도 열리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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