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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e lee Sep 26. 2020

여름의 여운

가을 4호


이번 주의 생각


여름은 적당한 것을 넘기지 못하고 기어코 끓게 만든다. 나는 여름이 정말이지 너무 좋았다. <피리 부는 여자들> 중에서


제주도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4박 5일 일정이지만 작은 배낭 하나 달랑 매고 가는 그 느낌이 참 가벼웠다. 커피를 마시며 공항 게이트에 앉아있는데, 지금 이 곳이 ‘공항’이라는 이유 만으로 내 삶이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첫 장을 이번 여행에 내어주고 싶어 채우기를 미루던 몰스킨을 가방에서 꺼냈다. 가장 자주, 그리고 오래 보게 될 첫 페이지에 ‘2020년 6월 12일. 효설이와 제주로 떠난다.’라고 썼다. 출발도 하지 않았고, 계획이라고는 잡아둔 숙소 밖에 없었지만 내 마음은 이미 호들갑을 떨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공항에 내려 버스를 타고 ‘베케’라는 카페로 향했다. 제주시를 벗어나자 넓은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 떼가 보였고 그제야 나는 제주에 왔음을 실감했다. 버스에서 내려, 정원을 따라 나 있는 꼬불꼬불한 길을 걸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가득한 큰 유리창 앞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들여다보는데, 메뉴판 위에 '베케'의 의미가 쓰여 있었다. 베케는 '밭의 경계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돌무더기를 뜻하는 제주방언'이라고 한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던함이 껄끄러운 나는 예상 밖의 토속적 의미를 품은 가게가 마음에 들었다. 주문한 오미자 에이드와 모카라떼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창밖 풍경은 신비로웠다. 몸을 웅크려야 겨우 볼 수 있던 작은 식물들, 이끼들이 내 눈 앞에 펼쳐져, 마치 내가 작은 벌레가 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이런 각도로 자연을 올려다 바라본 건 처음이어서 창밖 풍경에 시선을 풀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가방에서 몰스킨, 펜, 책, 필름 카메라를 꺼냈다. 약속이라도 한 듯 효설이도 주섬주섬 꺼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디에 있든 각자의 노트를 펼칠지, 이야기를 나눌지 고민했다. 그래서 늘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했다. 조용하게 각자의 시간을 갖다가 이야기를 나눌 때면, 꾸밈이 없어 자유로운 대화들이 자연스레 쓸데없는 걱정을 미뤄두게 되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도 찍고, 일기도 쓰고 책도 읽으며 잔잔한 시간을 보내다가 카페를 빠져나와 주변 정원을 걸었다. 흐린 날 특유의 촉촉함이 좋았다. 숲 냄새, 흙냄새가 한층 짙어졌고 그 향을 품고 싶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우리가 머문 곳은 위미리의 한 민박집. 직접 만드신 원목 가구들이 집을 채우고 있었고 귀여운 강아지가 살고 있었다. 벽에는 여행을 다니시며 찍은 사진들이 붙여져 있었고, 작은 식물들이 집 곳곳에 놓여있었다. 머릿속으로 그리던 그림보다 더 아름다웠고 편안한 향이 나는 그런 곳이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나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으니 사장님께서 저녁을 준비해주셨다. 회, 김치전, 두부김치.. 저녁을 먹으며 자연스레 제주에서 민박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듣게 되었다. 가구회사에서의 직장 생활이 행복하지 않아, 제주에 와서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며 민박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자기답게 사는 삶이 너무 편안하고 행복해 보여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낯선 사람과의 가벼운 식사자리까지 더해지니 정말 멀리 떠나온 느낌이 들었다.


씻고 효설이랑 침대에 몸을 누였다. 노래를 들으며 각자 일기장에 크고 작은 감정을 세세히 남기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 <유브 갓 메일>을 보며 잔잔한 여행 첫날밤을 맞이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자신의 하루를 메일로 보내는 모습, 유브 갓 메일!이라는 알람에 설렘 가득한 표정,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고민들은 보고 또 봐도 처음 보는 듯 생경 했다. 메일, 뉴욕, 서점, 꽃, 사람, 사랑..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ost를 들으며 거울 앞에 나란히 서서 양치를 했다. 효설이는 영화의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어떤 노래가 기억에 남는지, 어떤 대사가 좋았는지 말해줬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막연한 미래의 어느 날로 미뤄두었던 일을 실행에 옮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처럼 메일을 써서 보내도 될 것 같았고 어느새 내 마음은 설렘과 자신감으로 번져있었다.  




이번 주의 콘텐츠


Book

알베르 카뮈 <결혼, 여름>

나는 내게 맡겨진 이 삶을 사랑한다. 이 삶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보고 싶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그저 운이 없는 것이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니까 말이다.
나는 인간으로서 내가 맡은 일을 다 했다. 내가 종일토록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이 유별난 성공으로까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행복해진다는 것만을 하나의 의무로 삼는 인간 조건의 감동적인 완수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Book

박연준 <모월 모일>

여름밤은 익어가기 좋고, 겨울밤은 깊어지기 좋다. 봄밤은 취하기 좋고 가을밤은 오롯하기 좋다.
가끔 사람도 한 그루, 두 그루 세고 싶어요. 내 쪽으로 옮겨 심고 싶은 사람을 발견한다면 흙처럼 붉은 마음을 준비하겠어요.
책은 잠시 그 세계로 몰입한 순간만큼은 현실에서 나를 떼어놓았다. 내가 현실에서 벗어나려 애쓴 게 아니라 책이 애썼다. 책이 가진 능동성이 내 피동적 웅크림을 토닥였다. 숲을 베어 작은 종이 묶음을 만든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서 다시 숲이 되었다.


Movie

노라 에프론 <유브 갓 메일>

가끔 내 인생에 대해 회의가 들곤 해요. 내 인생은 소박해요. 소중하지만 소박하죠. 가끔 궁금해요. 이게 내가 좋아서 선택한 삶인지 아니면 용기가 없어서 이렇게 사는지 말이에요. 내가 살면서 보는 건 주로 책에서 읽는 걸 연상시키는데 사실 그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에요. 그냥 저 허공에 포괄적인 질문을 하고 싶었어요.
우리 토요일 점심시간쯤 우연히 마주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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