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들꽃으로 피어난 순간들
여러 사람과 협업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진행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작은도서관, 들꽃>은 내 안의 꽃들을 피워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도서관 바깥에 붙어 있는 칠판에 시를 쓸 때 큰 행복을 느꼈다.
도서관은 옥상에 있었는데, 그 옆에는 동네에서 제법 유명했던 중화요릿집이 있어서 언제나 사람들이 붐볐다.
그들은 음식을 먹으려고 자리가 비기를 기다리다가 바로 옆에 있는 우리 도서관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기웃거릴 때가 많았다.
도서관이라 하면 조금 더 크고 딱딱한 분위기일 것이라 상상하다가 10평의 작은도서관을 보면 신기하고도 낯선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진 못하고 바깥에서 기웃거릴 때 가장 잘 보이는 공간이 시를 적어 놓는 이 칠판이었다.
가까이 와서 시를 읽기도 하고 도서관 내부를 들여다보기도 하다가 결국 문을 열고 들어와 궁금증을 해결하고 가는 분들도 있었다.
난 어쩐지, 이 작은도서관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지 등을 알려주는 전도사가 된 것 같아 신나는 마음으로 친절하게 설명했다.
큰 책상 하나에 의자 몇 개가 다인 것 같은 공간에서 사람과 책을 연결해 주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일을 한다니.
듣는 이들의 얼굴에선 대부분 놀라움과 감동이 번져 나갔고, 말하는 내 눈빛은 더 초롱초롱해졌다.
시를 쓰는 순간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행복한 순간이었다.
큰 글씨로 써야 잘 보일 것이기에 긴 내용보다는 짧은 시를 주로 쓴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시인으로 등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이기도 했지만 평소에도 시가 좋아 자주 뒤적였다.
난 시가 왜 그리 좋았을까.
우선 시는 여백의 자리마다 누구나 잠깐 멈춰 서서 생각을 유도하는 것이 좋다.
'A는 B다'와 같은 똑떨어지는 문장이 아니라서 좋다.
그것은 이것이기도 하고, 이것일 수도 있으며, 이것이었으면 좋겠다 싶은 것이기도 하다.
그런 모호함이 때론 마음과 생각을 더 정확하게 전달해 주는 게 짜릿하다.
또 시는 우리의 감정을 조금 더 섬세하게 다듬어준다.
막연하게 좋다는 감정에서 이게 외로워서 좋은 건지,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좋은 건지, 좋다는 건 또 어떤 느낌인지, 감정과 생각이 자꾸 확장되고 깊어진다.
그런 시를 일주일에 한 편씩 칠판에 써서 지나가는 이들에게 소개하는 건 더 작은 의미에서의 도서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예기치 않은 곳에서 날아온 '쪽지' 같은 느낌의, 혹은 책갈피에 끼워 둔 '좋아하는 문구' 같은.
소소하고도 눈에 띄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해서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는 내 성향과 너무 잘 맞는 자리였다.
시를 쓰는 이 즐거움을 만끽하다가 맨 처음 도서관을 열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났다.
부모님조차 떨떠름한 표정으로 도서관의 시작을 축하해 주셨던 첫날, 아버지는 "일 년 동안 이 도서관이 딸의 피정(避靜)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하셨다.
나는 우선 '일 년'이라는 기간에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건 평생인데 왜 아버지는 일 년이라고 미리 못 박으시는 걸까 서운했다.
설령 현실은 일 년밖에 못 할지라도 오래도록 네 행복이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얘기해 주시면 안 되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또 '피정(避靜)'이라는 단어도 낯설었다.
찾아보니 주로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일상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처럼 조용한 곳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해 자신을 살피는 일'이란다.
피정의 기간이 일상보다 길리가 없다.
일상을 위해 잠시 자리를 옮겨서 자신을 살핀 뒤 다시 일상으로 빨리 돌아오라는 의미다.
결국 일 년이라는 시간적인 의미와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공간적인 의미를 합쳐 '너의 본질적인 자리는 거기가 아니다'라는 우회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 말이 맞더라도 도서관을 연 첫날에 그리 말씀하시니 내 속은 참담했다.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아버지마저 나를 다 이해해 줄 수 없다는 것이 서운하고도 슬펐다.
그런데 그 서운함이 일주일마다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 피정(避靜)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의 제약이 아니라, 일 년 동안이라도 온전한 쉼을 누리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시의 행간을 옮기다가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도서관을 연 기간을 통해 나다운 나로 살지 못했던 지난 삶들을 살피고 돌아보아 회복하라는 의미도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시를 쓰다가 아버지의 진심을 만나고 나다운 나는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니 이보다 더 살갑고 애틋한 피정이 또 있을까 싶어 울컥해질 때가 많았다.
도서관의 전체 그림을 놓고 본다면 이 시간은 정말 몇 개의 점에 불과한 순간들이었지만 나를 위로해 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다.
화려한 인물이나 역사가 세상을 주도하는 것 같아도 결국 버티고 살아나는 것은 잡초인 것처럼, 일 년간의 도서관 생활을 기쁘고 즐겁게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 소박하고도 빛도 나지 않을 고요한 시간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들었을 때 열게 된 <작은도서관, 들꽃>이 진정 나다운 나를 발견하게 하고 다시 살게 하는 내 인생 최고의 획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