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을 다 출가시키고 우리 부부만 남은 요즘, 참 힘든 시간들이 바람처럼 지나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수십 년을 강한 남편과 살면서 주눅이 들 때로 들어있었으나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까 싶어 제대로 된 내색 한번 못했었다. 남편은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주짓수라는 격투기를 즐길 만큼 활달한 성격인데 반해 나는 예민하고 소심했던 탓에 사소한 일에도 어긋날 때가 많았다. 나는 지나치게 강한 남편의 성격 때문에 늘 긴장을 했고, 예민했던 까닭에 상처를 받으면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입을 닫아버렸다. 침묵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내 나름의 노하우였고, 혈기왕성했던 남편도 꺾게 만드는 묘수이기도 했다. 남편 역시 무뚝뚝하고 목석같은 나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남편의 단점들이 하나씩 애정으로 채워져 간다는 사실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언젠가 남편이 내게 이런 말을 물은 적이 있었다.
“이다음에 나하고 다시 만난다면 다시 결혼해줄래?”
진지하게 묻는 남편의 질문에 그러겠다고 맘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사랑보다 더 진한 것이 정이라더니 속 깊은 사랑을 스스럼없이 내비칠 만큼 다소 여유 있게 변한 나를 보며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너무나 다른 성향 때문에 수십 차례의 이혼위기가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남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 나는 미술대학 진학에 실패하면서 큰 시련을 경험했었다. 그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먹구름을 일게 만드는 족쇄였고, 결혼생활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남편과 연예시절, 반드시 다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결혼 조건을 내걸 만큼 절박했었는데, 그 일이 실현이 되는 계기가 있었다. 수년 전 남편은 내가 공부하고 싶다고 했을 때 두말 않고 흔쾌히 허락을 했었다. 이 나이에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족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거 노후 대책되는 거지?”라며 능청스럽게 웃는 남편에게 “걱정 마, 내가 당신 용돈 팍팍 챙겨줄게”라고 큰소리치긴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새로운 도전 덕분에 치매 걸릴 일은 절대로 없을 거 같다.
내가 이처럼 늦은 나이에 배움에 열을 올렸던 이유는 다름 아닌 친정 노모가 암과 치매를 앓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가족력이라는 무서운 올무가 발목을 붙잡던 시점에서 뭔가에 몰입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남편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다.
그 이듬해 나는 거짓말처럼 미술대학에 입학을 했고, 4년을 무사히 마쳤다. 결혼 전에 지나가는 얘기로 치부될 뻔한 약속을 멋지게 지켜준 남편이 너무 고마웠다. 이후로 나는 또 다른 질주에 돌입했고, 남편의 도움으로 공방 겸 작업실을 열었다. 공방을 운영한 지 벌써 4년째다.
10평 정도의 작은 공간이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터이자 힐링터이다. 낡고 허름한 곳을 얻어 3개월에 거쳐 혼자 인테리어 작업을 했다. 인테리어라고는 인터넷을 통해 본 게 전부인데, 어깨너머로 지나쳤던 게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지는 전혀 예상 못했다. 동네 분들도 환골탈태했다는 표현을 쓰셔서 너무 기분 좋았다.
요즘 남편이 부르는 나의 새 이름이 꽤나 마음에 든다.
“어이, 이 화백.”
남들이 뭐라 해도 집에서는 이미 화가다. 가족의 응원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뼛속 깊이에까지 침투했던 우울증들이 어느새 이 빠진 노구처럼 변해 있었다.
중년의 세월이 폭풍우를 뚫고 지나가버린 어느 날, 하나 둘 늘어난 주름들이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