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로 맨땅에 헤딩 -33
푸콘을 떠나는 날 아침 거짓말같이 하늘은 쨍쨍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해는 약 올리듯 흰 구름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산티아고로 떠날 버스는 저녁 늦게 있었다. 체크아웃한 후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확실히 같은 장소라도 흐린 날과 맑은 날은 천양지차였다. 지난 이틀간 잠시 들른 라 포자 호수와 플라야 그란데 호수를 제일 먼저 찾았다. 지난날의 음침했던 라 포자 호수는 환호를 지르며 요트와 모터보트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가로이 호수변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아가씨들로 번잡한 플라야 그란데 호수 역시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제의 그 호수가 맞나 싶다.
시간이 많이 남아 마을을 벗어나 외곽의 산길로 들어가 봤다. 곧 덩굴 지대가 나타났고 덩굴마다 야생 블랙베리가 잔뜩 매달린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터키에서 블랙베리의 생김새를 본 기억이 있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 블랙베리가 많이 열렸네, 이거 하나 먹어봐”
산악인을 보채며 하나둘 따먹는 것이 어느새 배가 부를 정도로 먹었나 보다. 블랙베리를 처음 맛보는 산악인도 한 손 가득 든 채 먹고 있었다. 허구한 날 빵을 먹어 부족했던 비타민을 오늘 잔뜩 섭취한다.
“올라!(안녕!)”
근처에 사는 꼬마들이 낯선 이방인을 반긴다. 그들도 한 통 가득 야생 블랙베리를 따고 있는 것이 아마도 시장에 내다 파는 모양이다.
다시 푸콘 중심가로 돌아오니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비야리카 화산(Villarrica Volcano)의 장엄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만년설에 뒤덮인 비야리카 화산은 용암을 머금고 현재 활동 중인 활화산. 여길 포함해 활화산은 지구 상에 다섯 곳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투어를 신청해 많이들 오르는 최고의 도보여행 코스로 우리도 참여하고 싶었지만, 이틀을 공친 터라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인근 레스토랑의 야외테이블에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았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오래 버틸 생각으로 푸짐한 음식을 시켰다. 준비되는 시간도 꽤 걸리니 이래저래 두어 시간은 보낼 수 있으리라. 산악인은 시큼한 양념으로 간을 맞춘 연어구이를, 난 아르헨티나에서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한 아사도(Asado)를 주문했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맛을 보라면서 종업원은 작은 잔에 담긴 과실주를 가져다줬다. 피스코 사워(Pisco Sour)라는 이름을 가진 남미에서 주로 식전에 마시는 술로 목 넘김이 좋고 달곰하지만 종류에 따라 40~70도 정도의 매우 높은 도수를 자랑한다. 얼마나 독한지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대낮에 빨개진 얼굴이 부끄러워 모자를 힘껏 눌러써보지만, 오히려 더 어색해 보인다. 그 모습을 지켜본 여종업원은 미소를 지었고 지나는 사람들 역시 더 흘끗흘끗 쳐다본다. 가뜩이나 동양인이라 눈길을 끄는 와중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으니 오죽했으랴.
주문한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주요리가 올라왔다. 연어구이는 바릴로체에서 먹은 맛과 비슷한 수준, 아사도는 그야말로 환상의 맛이었다. 아사도는 어린 쇠고기의 갈비 부위에 소금을 뿌려 숯불에 구운 음식. 나이프로 자르면 핏물이 줄줄 흘러나와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지만 한 점을 잘라 입에 넣으니 곧 달콤함이 몰려왔다. 혀에 착착 감기는 부드러운 육질에 또 한 번 놀란다. 음식을 준비하느라 오랜 시간 정성을 들인 요리사가 테이블로 다가와 맛이 어떤지 물었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무이 리코(정말 맛있어요)”
를 정확히 두 번 화답했다. 남미를 찾는다면 꼭 한 번 맛보길 권한다. 최고의 맛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