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로 맨땅에 헤딩 -40
비냐 델 마르에서 발파라이소까지는 지하철로 불과 여섯 정거장. 발파라이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창밖으로 제일 먼저 빈민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언덕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빈민가는 호화로운 비냐 델 마르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산티아고의 바다 현관’이라고 불리는 발파라이소(Valparaiso)는 칠레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로 16세기 산티아고로 향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해왔다. 또 칠레가 낳은 위대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의 집이 이곳에 있다.
기억하기엔 초등학교 4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사회 과목이었을 것이다. 칠레의 발파라이소가 당시 교과서에 여행 후기 식으로 잠깐 언급이 되었다. 기억이 희미해 잘 떠오르진 않지만, 남극의 킹 조지 섬(Isla King George)에 근무하는 아빠를 그리는 딸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어린 나이에 막연히 동경했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발파라이소. 어떤 곳인지 궁금해 지도책을 펴서 바로 찾아보고 국어사전까지 들춰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약 20년이 지난 지금, 그 시절의 소년은 청년이 되어 지금 이곳에 서 있었다. 오래된 항구에 정박한 대형 선박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빨리 안 오고 뭐 해?”
저만치 앞서 걷던 산악인은 얼른 오라며 재촉했다. 지하철역에서 나오자 시큼한 비린내가 풍겨왔고 곧이어 전형적인 오래된 항구의 전경이 펼쳐졌다. 작은 광장에는 수많은 이들로 북적였고 바로 옆에 있는 프랏 부두(Muelle Prat)엔 작은 동력선부터 대형 군함과 화물선까지 잔뜩 정박해 있었다. 어선 위로는 생선조각을 먹으려는 펠리컨 떼들이 날고 있고 반대편에 있는 기념품점에서는 끊임없는 호객행위가 이루어졌다.
항구 주변은 오물과 악취로 가득했다. 바로 옆의 비냐 델 마르와는 확연히 달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빈부 격차가 심해 보였다. 순찰하는 경찰관이 슬럼가 밀집지구로는 접근하지 말라며 경고하는 것을 보니 치안도 매우 불안해 보였다.
항구를 뒤로하고 조금 걸으니 소토마요르 광장(Plaza de Sotomayor)이 나온다. 이곳은 부두에서 중심가로 들어가는 일종의 관문. 중앙에는 태평양 전쟁의 영웅을 기리는 기념탑이 위치했고 회색빛의 칠레 해군 총사령부의 모습은 자못 웅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곳곳에 보이는 지저분한 비둘기 떼와 떠돌이 개의 모습은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슬럼가 골목을 피해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오르막길을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이곳 일대는 벽화가 가득한 콘셉시온 언덕이다. 발파라이소는 산을 깎아 만든 도시라 항구에서 벗어나면 바로 오르막이 시작된다. 누님들이 이곳에서 머물 숙소를 구하는 동안 골목 곳곳을 둘러봤다. 골목마다 색색의 페인트칠을 한 오래된 집들이 들어서 있는 것이 인상 깊다. 유명한 미술작품의 그림을 벽화로 꾸민 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인근 호스텔에 숙소를 잡은 누님들과 늦은 점심을 먹으러 왔다. 메뉴는 닭고기와 토마토, 치즈가 들어간 멕시칸 음식 케사디야(Quesadillas). 끈끈한 치즈가 토핑 된 피자의 맛과 비슷한데 어째 모양만 다르다.
어느덧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제 정든 누님들과 작별의 시간.
“비 케어풀. 굿 럭! 킵 인 터치”
우리보다 열 살이나 많은 카트리나는 막냇동생들을 먼 길로 보내는 불안한 누님의 얼굴이다. 이메일을 교환하고서 서로의 여행 운을 빌어준다.
발파라이소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산티아고로 떠나는 버스는 이미 매진이었다. 일요일을 맞아서 그런지 표를 구하지 못한 관광객으로 터미널은 이미 미어터질 지경. 기도하는 심정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비냐 델 마르 버스터미널로 이동해 운 좋게 두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산티아고에 도착하니 자정이 훌쩍 넘었다. 허겁지겁 두 도시를 둘러본 무리한 일정에 온몸이 축 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