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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나딘 Dec 17. 2020

엄마의 그림일기-OO덩어리야!

토리가 어린이집을 다니던 시절에는 겨울에도 유리구두 같은 샌들을 신었고, 콩쿠르에 나갈 것 같은 드레스를 입고 갔었단다. 난 선생님들께 매일 양해를 구하며 드레스 속에 레깅스와 면티를 내복 대신 입혀 보냈었지. 또, 아침 식사 후에는 네가 동화 속의 주인공 이름만 대면 척척 그 헤어스타일을 해내야만 했다. 덕분에 난 머리카락을 땋고 묶는 실력이 엄청 늘었. 유튜브를 보며 예습도 했었으니...

그러면서늘 속으로부디 체육복 시기가 하루빨리 도래하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너의 성장을 고대했었단다. 그렇게 난 너의 무의식 내에 드레스나 공주놀이에 대한 억눌린 욕구가 잔재하지 않기를 바라며 떼쓰지 않고 엄마를 잘 설득시키면 그 요구에 대부분은 응해주었단다. (마차는 불가했던 요구였지만, 왕자를 대신해서 아빠가 드레스 입는 너와 춤을 추었지.)


정말 신기하게도 육아 선배들의 말은 대부분 빗나가지 않는다. 체육복 시기가 드디어 찾아왔다. 6세 후반부터 변화의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7살의 토리는 완전한 체육소녀로 변신했다. 성격도 조금씩 외향적으로 바뀌었고, 머리도 번거롭다며 짧게 해달라고 했다. 만세를 외쳤지. 알아서 편한 옷을 꺼내 입어주니 세상 고맙더구나. 덕분에 난 새롭게 달리기를 해야 했지만...


난 늘 소극적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신경 쓰며 친구들의 말에 상처를 잘 받는 토리의 성격이 너무 걱정이었단다. 젖먹이 시절에도 눈을 뜨면 울지 않고 웃으며 옹알이를 했던 토리였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집에 오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너를 보고는 문제를 직감했지. 예민하게 관찰하고 선생님과 상담을 집요하기 하니 유치원에서 특정 아이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모든 선생님들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영특한 친구는 너를 책상 아래에서 몰래 꼬집기도 했지. 그런데도 넌 그 아이를 배려하느라 화도 못 냈다고 했었어.


이런 네 성격을 잘 알기에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뜻을 굽히지 말고, 마음에서 울리는 소리를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현명하다고 가르쳤단다. 그 말이 상처가 될 것 같다고, 혹은 상대방이 화를 낼 것 같아 참는다면 오히려 네가 상처 받게 될 거라고 말했지. 또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루기 위해서는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어. 생활하면서 작은 부분에서부터 목표 달성에 대한 쾌를 알려주고자 나도 머리를 짜냈었지.


그런데, 왜 이 모든 것들을 지금의 토리는 나에게 적용하는 걸까?

취침 시간이 가까워서 못하게 된 너의 간절한 놀이는 스스로 새벽잠을 반납하면서 그 목표를 달성하더군. 

네 마음의 소리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며 잠시 앉아서 들어달라고 하더니 차근차근 나름의 논리로 모두 전하더구나. 가끔은 화도 내면서 말이야.

(그 순간은 당황스럽고, 귀엽고, 동시에 나도 화가 나는 매우 독특한 느낌이다.)

내 목이 아파도 본인이 뽑아온 목표치의 책은 내가 다 읽어내야만 잠이 든다. (독하게 잠을 참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했던 말이 있기에 그 순간 야단을 치려면 미리 머리를 좀 굴려야 한다. 감정적으로 화를 낸다면 순간 무서워서 참을 수는 있겠지만,  그 화살은 다시 내게 올 것이기 때문이.


부메랑.... 일까?

아니면 이렇게 너의 공간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조금씩 연습을 하고, 나중에 너만의 사회생활 속에서 실천하려는 일종의 연습이니?

으휴~고집불통. 억지 덩어리. 심술 덩어리. 내 말을 모두 기억하는 기억 덩어리 같으니라고.

이수경, <번역된 도자기>

이수경 작가는 깨진 도자기를 이어 붙여 전혀 다른 작품으로 제작하며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분이란다. 완성도가 낮은 도자기는 가마에서 나오는 탄생의 순간에 작가의 손에 의해 다시 부서지게 되어 있단다. 그런 파편들을 이수경 작가는 모아서 접합해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재탄생시단다. 미술이 가진 치유의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지. 또, 도자기가 지니는 전통적인 의미와 동양적 아우라를 현대와 서구 미술의 서사로 잇기도 하고 말이야.


그런데 지금 내 눈에는 내가 너에게 심력을 다져주기 위해 했던 말들의 덩어리로 보인다.

차곡차곡 쌓고 이어 붙여서, 너에게 유리한 말들로만 꽁꽁 뭉쳐둔 덩어리로 보인다고, 요 녀석아.

이수경 작가는 어찌나 유명한지 2017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에 초대되기도 했단다. 토리도 이렇게 똘똘 뭉친 심력으로 당차게 세계로 뻗어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욕심....)


깨진 조각들을 에폭시로 이어 붙이고 그 위에 금으로 띠를 둘러 마감한 빛나는 상처들은 흉이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파편들을 잘 붙들고 있는 끌어안은 손처럼 보이기도 하는구나. 지금 내게 하는 너의 이러한 행동과 말들이 에폭시가 된다면 얼마든지 감내 하마. 그런데 흉을 숨기기 위한 금띠에 불과하다면 난 이제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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