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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나딘 Dec 13. 2020

엄마의 그림일기-벌

"엄마와 했던 약속 지켰니?"

"하지 말라는 것들은 잘하면서, 진짜 네가 해야 하는 것들은 잘하고 있니?"

"이제부터는 엄마와 약속할 필요 없다. 너 스스로  자신과 약속을 해."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느껴지는 그 속상한 마음도 네가 스스로 감당해"


휴우~~~~

7세 딸에게 엄마는 항상 가혹한 말을 해버리는구나.

그런데 진짜 나도 말도 못 하게 화나고 속상했어.


그 사건은... 네가 할머니 댁에서 두 분의 후광을 방패 삼아 자유를 심하게 누린 데에서 비롯되었단다.

매주 금요일은 윗 집에 살고 계시는 토리의 할머니 댁에서 자는 날이라 역시나 지난 금요일도 아침부터 신이 나서 방방 뛰더구나.


평소 같으면 토요일 오전 10시 이전에 내려오는데 11시가 넘어도 안 오더라. 물론 전날도 너의 취침시간을 훌쩍 넘겨서 늦게 잠든 사실을 알고 있었지.

오후 1시 쾅쾅쾅 발소리가 들리고 토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지.

그러면서도 어제 본인과 내가 약속했던 슬라임 만들기를 하자고 당당하게 말하더라.


나! 으! 분노 게이지는 이미 빨간불을 지나 수치로 표현할 수 없는 단계였다.


토리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니?

태블릿이 너에게 끼치는 나쁜 영향을 알고는 있지?

그런데도 아침 식사도 입맛이 없다는 핑계로 거르면서 너에게 금지된 것을 알면서 그 오랜 시간 자유롭게 보다가 내려오다니... 약속도 어겨가면서 오랜 시간 봤던 이유가 뭐니?


당연히 너무나 재미있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못했겠지. 재미난 것만 계속하고 싶었을 테고, 집에 내려오면 못할게 뻔해서 할머니 침대에서 계속 버티며 보았겠지.


자! 그래서 엄마의 벌은 이거였다.

잘한다고 자랑하던 줄넘기, 100개!

금지된 것을 오랜 시간 해보았으니 이번에는 네가 꾸준히 연습하지 않아서  못했던 것을 해내라.

심지어 어지러워서 쓰러져도 내가 안전하게 살려낼 거고, 만약 큰일이 나더라도 119 아저씨가 오실테니 걱정 말고 100개 해내라고 했다.


"엄마의 머리로는 스스로에게 독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집어삼키는 그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으며, 당장  약속한 당사자가 없다고 지키지 않는 마음가짐도 이해되지 않는다. 또, 너도 지키지 않는 약속인데 나는 왜 엄마라고 매일 그 약속을 지켜주어야 하는데?"


너의 줄넘기 총합은 약 700여 개였어. 그러나 한 번에 100개는 하지 못했지. 난 매번 다시 하라고 나직하게 말했고, 너도 오기로 계속 시도했지.

결국 넌 힘들다고 울었고, 팔이 아프다고 찡찡거렸다.


"태블릿은 당장은 즐거워도 조금씩 너의 뇌를 멈추게 할 것이며, 눈은 나빠져서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밝은 세상을 볼 수 없게 될 것이 뻔하고, 웅크린 체 몇 시간이나 있던 너의 몸은 약해져서 그렇게 아픈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자신과 약속을 하라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본인이다. 그러니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되는 거야. 그 순간 아픈 마음은 누구도 아닌 네가 감당해야 하는 아픔인데 상상을 초월할 거야"라고 독한 말을 뿜었다.


이놈의 직설. 독설.

유턴도 없는데 애한테...

나는 뭐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키나? 아이고...

Frank Stella, <The Marriage of Reason and Squalor, II>, 1959.

시커멓게 타버린 내 마음, 네 마음이 검은 회화와 똑같겠지? 이 작가는 캔버스 위에 붓이 가야 하는 길, 그림으로만 이어지는 길을 그렸단다.

작품을 보는 순간의 즉흥적인 감동만을 위해서...


인생을 살면서 네가 가야 하는 길, 그리고 내가 바라는 네가 갔으면 하는 길...

눈만 마주해도 둘이 웃음을 머금는 그런 사이였는데... 그런데 그 어떤 바람이 둘 사이에 놓이고, 또 윤리적 잣대와 기대가 섞여 엄마는 '혹시나', '나중에', '만약에'라는 생각으로 지금의 널 야단치는구나. 안 그런다고 매번 반성하고도 또 그런 일을 하다니 이성은 어디에 두고 이리 감정적인지 미치겠구나.


그럼에도 매번 넘어가면 지키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너의 삶이 되어버릴까 봐...


독하게 마음먹고 버릇을 고치기로 했다. 줄넘기를 마치고, 내가 내준 숙제도 다 하고는 지쳤는지 침대에 누워 울다가 잠들었다.


또 땅을 치고 후회한다. 엄마는 오영은 교수님을 만나 뵈어야 할 것 같다. 너무 어렵구나~ 성숙한 어른이 되는 법을 몰라. 현명한 엄마가 되기엔 너무 부족한 사람 같구나.

그냥 사랑만 주면 될 것을... 붓질로 길을 만들려 드니 벗어나는 네게 독설만 퍼붓는구나.


엄마때문에 토리가 마음 고생이 참으로 많구나. 미안해...내가 너무 미안해.

내일은 마음을 잘 다스려볼게. 지금 내가 나 자신과의 약속을 매번 못 지켜서 너무 개탄스러워. 그리고 많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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