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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색고양이상점 Feb 11. 2017

200일, 지워진 여행의 기억.

태국

10월이었다. 한국을 다시 밟은 그 날은, 10월 어느날이었다. 


"우리 한국에 다시왔네, 정확하게 200일만이야." 

"그러게, 돌아온 것 같지 않아. 그냥 거쳐가는 또 다른 나라같이 느껴져"


중력마저 힘겨워했다. 여행자 둘뿐이었지만, 그들을 지상에 발붙이게 하는 건, 중력조차 힘겨워했다.   

마중나온 언니, 반겨준 어머니, 놀란 엄마, 너는 누구냐는 듯이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는 아기 말티즈 한 마리. 

나를 둘러싼 관계라는 중력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왜 와야했는지, 나는 누구인지를 보라 강변했다. 그들이 내게 웃음으로, 환희로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스스로 묻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지"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200일만에 처음으로 하는 전화였고, 처음으로 하는 메신저였다. 


"뭐해?"

"엄마랑 언니랑 얘기하는 중이야" 

"으응, 그렇구나."

"오빠는 뭐해"

"그냥 있어"


부재였다. 전화기 넘어로 들리는 목소리는 부재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다. 누군가 전화기 넘어로 부재할 수 있다는 느낌을. 일상은 그렇게 다가왔다. 우리는 전화하는 사이였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셨고 내게는 방이 있었다. 매순간이 우리를 너와 나로 찢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고 인사하는 듯했다.


가까운 사람이 죽고 나면, 우리는 한동안 슬퍼하다가 이내, 잊어버리고 다시 잘 살아간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러다가, 기일이 되면 향을 피워 영혼을 불러 의식을 밝힌다. 나는 작년에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을 돌려 보내드렸다. 할머니, 할아버지와는 각별한 사이었고, 많이 울었다. 그런데, 이제는 제사 지내기도 귀찮다. 나는 제사 지내기를 아주 싫어한다. 그렇다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완전히 잊은 건 아니다. 가끔, 아주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는 홀로 버스에서, 길에서 조촐한 제사를 지낸다. 아무도 모르게.


 돌아온 날로부터 200일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나는 이미 200일을 하루하루 잘 지워냈다. 잊고 잘 산다. 그러다 문득 부재에 던져 둔 아주 행복했던 시간에 불을 밝혀, 홀로 제사를 지낸다. 불을 밝힌다고 지나간 것이 돌아오지 않지만, 돌아오라고 불을 밝히는 게 아니다. 


그냥, 그랬었다라고 중얼거리면서 불을 밝힌다.

 우리는 여행자였다. 그냥, 그랬었다.


 2016년 3월이었다. 태국 방콕 땅을 밟았다. 둘이 합쳐 400만원이 전부였고, 목적은 세계일주였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처음 3일은 숙소에 지내면서, 관광을 했다. 사진도 찍고, 맛있는 것도 먹고. 마음 한 켠에는 이 여행이 어떻게 될까를 늘 걱정하면서, 기대했다. 

 돈이 없이 어디까지, 얼마나 여행할 수 있을까하는 기대와 그저 뻔한 결과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걱정. 기대는 곧 걱정이었고, 걱정은 곧 기대였다. 


기대는 곧 걱정이었고, 걱정은 곧 기대였다.

사진을 찍어서 팔아볼까, 온라인으로 번역을 조금씩 하면서 돈을 벌어볼까 등등 온갖 생각이 스쳤다. 한 날은 둘이 커피숍에 앉아 푸념하다가. 오랜만에 웃었다. 여행하면서는 웃을 것만 같았고, 행복할 것만 같고, 힘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여행은 실전이다. 묘수를 찾아내지 않으면 돈은 떨어지고, 곧 여행은 끝난다. 우리는 처음으로 여행이 이런 낯짝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고, 여행은 아주 힘들었지만, 힘든 만큼 한 걸음 나아가고 싶은 묘한 쾌감이 들기도 했다. 


태국, 방콕의 한 까페.
 카우치서핑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카우치서핑을 하기로 했다. 당시 사투의 흔적을 찾다보면, 몇 백명의 호스트에게 추파던진 기록이 남아있다.심지어 한국어에 관심있는 태국인들 페이스북에 먹을 것과 집을 제공해 준다면, 한국어를 무료로 알려주겠다고 메시지를 뿌리기도 했고, 한국어 학원에 일자리가 있는지 이력서를 날리기도 했다. 물론, 대개는 거절당했거나, 무응답이었다. 모두 녹록지 않았다. 여행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에 홀려서 된통 고생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하는 생각에 골몰하느라 여행하는 게 행복하지 않았다. 맛있는 걸 먹어도 돈 때문에 고민, 숙소를 잡아도 돈 때문에 고민이었다. 

 고민이 깊어지다가 그냥 때려치우고, 놀다가 돈 떨어지면 가야지 어떻게 하겠어하는 생각이 들무렵, 호스트 중 한 명에게 연락이 왔다. 방콕에 사는 미국인. 아빠와 아들 둘이 큰 집에서 살고 있는데 방을 내어주겠다고 했다. 많이 행복했다. 호스트와 약속을 잡고, 오후 5시에 터미널 21에서 만나기로 했다. 

  


호스트를 기다리면서, 터미널21


호스트를 만났고, 5일을 호스트네 집에서 지냈다. 호스트는 아들 한국어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우리를 초대했다. 우리는 한국어 녹음을 조금 하고 호스트네 집에서 몇 일을 묶을 수 있었다. 호스트네 집에 묶으면서, 방콕을 구경했다. 


태국, 방콕, 까오산로드.



호스트는 우리에게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라고 했으나, 우리는 5일만에 방콕을 떠나기로 했다. 호스트 덕분에 간신히 살인적인 방콕물가를 빗겨났고, 원한다면 싼 음식으로 연명하면서 집값을 아낄 수 있었지만, 방콕이라는 도시가 싫었다. 빼곡하게 늘어선 건물,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스치지만, 인정이 느껴지지 않는 도시가 싫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까오산로드는 갔다왔냐고, 방콕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나는 그냥 다라고 대답하거나, 다별로 등등으로 뭉뚱그렸다. 방콕은 우리에게 그런 동네였다. 돈이 있어도 사람냄새 안 나서 살기 싫은 동네. 하물며, 돈도 없는데 방콕이 왠말이냐! 결국, 우리는 방콕을 떠나기로 했다. 물론, 믿는 구석이 있었다.


치앙마이에 있는 호스트들이 와도 좋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우리는 호스트에게 인사를 하고 치앙마이로 향했다. 물론, 치앙마이로 가게 된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치앙마이에 사는 카우치서핑 호스트 무려 두 명이 자신들 집에 와도 좋다는 답신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장 짐을 쌌고, 치앙마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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