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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색고양이상점 Feb 11. 2024

명상일지

2023.10.15 / 10.17

그동안 명상을 통해 깨친 마음 자각에 대해 


 2023.10.15


 어떤 마음이 일었을 때 그 마음에 몰입하지 않고, 그 마음과 거리를 두게 되는 의식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되었다. 어떤 마음이 일었고, 그 마음과 바로 거리를 두게 되면, 그 마음이 왜 생겼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바로 알아차리게 되면, 버리려고 하고, 일어난 마음에서 금세 떨어진다. 

 - 아마도 슬픔을 슬픔이라 부르면 더 이상 슬픔이 아니게 된다는 선종의 화두와 결이 같은 것 같기도 하고


 명상을 하다가 목에 가래가 낀 느낌이 들었고, 그 순간 목에 낀 가래에 신경이 집중되었다.  가래가 끼었다는 사실에 몰입하고 있는 마음에 거리를 두면, 가래가 꼈다는 사실이 작아지면서 귀찮게 느껴지지 않는다. 느낌과 기분은 어떤 사실을 부풀리고 마음을 쏠리게 만든다. 그 느낌과 거리를 두면 문제는 작아진다. 


2023.10.17


 기억을 되돌아보기를 반복하다 보니 실제로 겪은 기억인지 아닌지 가물가물한 것들이 있다. 상상으로 만들어 낸 이미지가 기억되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들었던 내용이 머릿속에 기억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 주로 떠오른 '기억'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니, 인정받고 싶었던 욕구, 부정당하지 않기 위한 욕구가 '기억'의 바닥에서 기억을 밀어 올린 큰 줄기였던 것 같다. 그 기억들을 계속 비워내면, 인정욕구가 밀어 올린 기억들이 '지금'과 끊어질 수도 있겠다. 상상력을 움직이는 여러 욕구들은 어린 시절 부모의 '언어'로 욕망의 옷을 입는 듯하다. 부모의 언어는 곧 부모의 생각이자 가친관인데 말이다. 



돌아보며


10월 15일 


 기분이 태도가 되는 사람이었다. 기분에 쉽게 사로잡혀 여과 없이 감정이 나를 집어삼켰다. 기분이 마음을 사로잡아 멋대로 굴 때가 되면 기분이 태도로 발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내면에서 전쟁을 벌였다. 나는 최선을 다해 억눌렀지만, 늘 기분은 태도로 발산했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내 기분에 영향을 받았다. 기분이 가라앉고, 내가 노력을 했다고 항변해도, 그들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나는 기분이 태도가 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나의 기준에서 최대가 타인의 기준에서 최소에 미치치 못한다면, 나는 관계에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이다. 


 명상을 하면서 처음으로 기분이 혹은 감정이 '나'와 같지 않음을 자각했다. 실로 엄청난 깨달음이었다. 기분이 '나'가 아니라면, 기분이 나를 휘감을 때 휘감기지 않을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2023, 10, 15에 마음에 이른 깨침이었다. 


10월 17일  


 '기억은 확실하지 않기가 쉽다'는 자각에 이른 듯하다. 우리는 누군가 이야기를 해주면 상상을 통해서 상대의 이야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구성하는 능력이 있다. 무수한 기억 속에서 직접 경험하지 않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지난 브런치글에서 사람의 습관과 행동양식은 경험이라는 기억을 통해서 구성되고, 사람이 내리는 80%의 선택은 두려움에 기초한다고 썼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도 기억은 얼마든 내 머릿속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결국,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들의 토대가 나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다섯 살 때 내가 강렬하게 느낀 공포가 있을 경우 그때 느낀 공포라는 감정으로 바라본 내 세계가 기억으로 저장된다. 그 기억은 현재의 내가 당시와 비슷한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 때도 관여한다. '그때 이렇게 무서웠으니까, 그런 무서운 결과를 일으킬만한 판단은 하지 말고 다른 판단을 해야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다섯 살 때 부모가 내게 어떤 말들을 했고, 나는 그 이야기를 상상력으로 머릿속에 저장했다고 하자. 지금의 나는 기억이 너무도 많아 어떤 기억이 부모가 내게 말을 해서 내가 나름의 방식으로 구성한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고 또 그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부모의 가치관을 그대로 내면화하고 부모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대하는 것을 보면, 기억과 경험의 강도와 세기를 통해 생각하고 판단하는 '나의 생각은' 사실은 부모 생각 복사본에 가깝다. 더 확장하고, 강하게 말하면. '나의 생각은' 부모와 사회가 주조하는 생각의 복사본의의 합이다. 


이때 즘 나는 이런 마음에 이르렀다. 


 '나'는 나의 기분과 태도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나의 생각은 실로 온전히 나의 생각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명상에서 생각된 기억을 비운다는 것은 부모와 사회에서 주조된 생각과 거리를 둔다는 것이고, 그 생각이 좋다 나쁘다고 판단하는 그 판단과 거리를 둔다는 것이다. 감정은 일어나는 것이고 나는 그 감정에 휩싸일지 말지 선택할 수 있다. '나'에게 덧씌워진 것들을 깡그리 지워낼 수 있다면, 그 지점이 있다면 나는 거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 '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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