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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색고양이상점 May 25. 2024

명상 vs 우울

우울을 이기는 방법(명상의 지혜)


 


우울의 역사 


명상을 해보면 우울증에 효과가 있는 것 같지만 그 과정이 쉽다고는 할 수가 없다. 명상을 하기 전에는 최대 한 달에서 짧게는 2주 동안 우울에 지배당해 간단한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였고, 중요한 건 스스로 우울이 충분히 나를 잡순 후에 놓아줘야 비로소 '아, 오랫동안 기분이 다운되었었네?'라고 생각했을 뿐이고, '우울증'으로는 인지가 안 되었다.  명상을 한 지도 1년이 다 되어간다. 1년 동안 마음에 때를 밀어내면서 인간이 갖는 오만가지 더러운 부분을 직시하고 포용하려고 애를 쓰고, 포기하고 또 애를 쓰고를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덕분에 여러 면에서 '나'라는 인간이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러 면'에 우울증은 쉽게 포함되지 않거나, 우울증의 핵심은 비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제까지는. 



마음 들여다보는 과정 


 자꾸 반복하지만 명상을 하다 보면 무언가를 머리로 까딱까딱 이해하는 게 아니라 머리가 터져서 지식과 정보가 마음에 쏟아져 흘러내리는 충만함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런 순간은 늘 겸손한 마음상태와 함께한다. 그렇다고 머리로 까딱까딱 이해하는 게 불필요한 건 아니다. 머리로만 골몰하는 과정도 필요해 보인다. 머리로만 어떤 문제를 골몰하기 전에는 어떤 문제에 대한 '인지'가 필요하고, '인지'를 위해서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뿌연 감각들을 '언어'로 박제해서 낚아 올리는 게 중요한 듯보인다. 생각이 있고, 생각을 대변할 언어가 필요한 게 아니라, 언어가 있어서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명상 경험상 그렇다는 뜻이지 철학사의 싸움에 끼어들 생각도 없고, 깜냥도 없으니 언어가 먼저니 생각이 먼저니 그런 건 지나가자) 


 명상을 통해 마음과 생각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들여다보니 그동안 '우울'에 대한 인지가 확실히 되지 않았나 하는 데 마음이 미쳤다, 어제 와서야 비로소. 



우울이라는 자아


 어제저녁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나'를 죽여버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더욱 잔혹하게 제거할 수 있을지 기괴한 갈증이 올라오면서 계속 '나'를 죽일 방법을 강구하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자아' 혹은 '에고'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자아를 죽이고 있던 셈이다. 그러다가 문득 '자아'의 속성의 90퍼센트 이상이 '우울자아'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일었고, '자아'를 '우울자아'란 언어로 박제했다. '나'를 버리다가 '우울자아'를 죽이기 시작했다. '우울자아'를 한 번씩 죽일 때마다 몸에 반응이 왔다. 눈물이 흐른 건 아니지만, 눈가가 촉촉한 느낌이 왔다. 마음이 '우울자아'를 한 번씩 죽일 때마다 빠짐없이 반응을 보내왔다는 데 놀랐다.



우울자아 해체시작


어제 이후로 명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 설렌다. 우울자아를 수십 번이나 죽여보니, 우울자아가 덮고 있던 부분에 생채기가 났나 보다. 우울자아를 죽인다는 건 우울자아를 형성한 모든 원인을 제거하겠다는 의지이다. 원인들은 과거에서 비롯되어 현재도 나를 잡고 있는 원인들이다. 원인들은 지금 몰라도 괜찮다. 결과가 부정되면 원인들은 자연스럽게 부정된다. 

 생채기가 난 부분 밑에 뭔가 여러 면면이 감춰져 있다는 게 미약하게나마 감지가 된다. 아마 우울장막이 걷힐 때 우울에 에너지를 공급하던 과거의 면면이 드러날 수도 있겠다.

 과거의 면면이 드러나서 소멸한 다는 건 현재에 온전히 있을 힘이 커진다는 뜻이기도 하며 동시에 '나'의 힘이 약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음이 가진 능력


마음이 가진 능력이 있다. 자신이 어떤 모양과 색깔인지 알려주는 능력이다. 책을 읽으면서 울컥하는 부분에 밑줄들을 쳐서 읽는 것도 마음이 자신은 그런 문장에 반응하는 존재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어제 이후로 '우울자아'라는 단어에 마음이 자꾸 반응한다. 마음이 '아프다'라는 목소리로 반응하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은 마음의 목소리를 잘 듣고 이끌어내어 자유로워지는 방향으로 흘리는 과정이기도 한 것 같다. 



명상을 하면서 피어오르는 지혜


 머리로만 알면 행동이 변화하지 않는다. 행동이 변화하면 온전히 몸과 마음이 변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동안 명상을 하면서 마음이 서늘해지면서 행동에 변화를 일으킨 문장을 적어보려고 한다. 


1.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사실 지고 이김이 없음을 추구하는 과정이 전부다.

2. 언어의 힘은 매우 강해서 생각을 지배한다. 욕을 하거나 거친 말을 하는 게 꺼려진다. 말을 아끼게 된다. 

3. 인간이 가진 약점(돈, 사랑, 명예, 권력, 열등, 자존심 등)들은 자아를 키움으로서 방어된다. 몸집을 키우는 일처럼 부질없는 것이 또 없다. 약점은 인정하고 직시하는 과정에서 '나'는 죽고 그만큼 자유로워진다. 

4. 사람은 자기가 겪었거나, 겪고 있는 것들을 토대로 세계를 해석한다. 

5. 타인에 대한 감정적 험담은 스스로의 토대가 부실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6. 누군가 칼을 휘두르면, 바람이 되어 그저, 그치면 그뿐이다. 

7. 우울자아는 나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인정하자. 


8. '머리로만'아는 것은 행동을 바꾸지 못한다. 온전히 변해본 경험만이 본질이다. 본질이나 진심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본질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말이 새는 것이고 가볍기 그지없다. 그런 점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9. 고통은 변화의 에너지이다. 고통을 회피를 하더라도, 너무 오래 주저앉지 말고, 직시하더라도,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눈을 부라릴 필요는 없다. 너무 오래 주저앉아 있는 것과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직시하려는 마음은 고통의 두려움에 잡힌 결과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두렵다고 이야기하고, 어느 정도 함께 지내는 것이다. 힘을 빼고 고통이 어느 정도 나를 흔들게 두어야 한다. 


10. 논리학은 잘못쓰면 마음을 피폐하게 한다. 논리는 양날의 검이다. 마음을 잘 다독이고, 들여다보는 도구로 쓴다면, 그리고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함께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면 귀한 도구겠지만, 공격이나 방어를 목적으로 쓴다면 나와 너를 피폐하게 만든다. 


11. '나'가 1-10까지의 지혜를 깨달았다고 한들 타인들보다 높지 않다. 1-10까지의 지혜를 이해했기 때문에 타인들보다 높다고 생각한다면, 그 높은 만큼의 고통이 찾아오게 될 거다. 1-10까지의 지혜의 바탕에는 내가 너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다는 겸손이 자리해야한다. 우리는 그냥 서로 옆에 있을 뿐이며, 1-10까지를 몰라서 고통받는 네게 측은지심이 들거나 무관심 해야 정상이다. 측은지심은 사랑한다는 뜻이며, 무관심은 나와 상관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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