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래킹 11일차
오래도 묵힌 글이다.
6년이 흘렀지만 하산의 막바지에서 겪은 그 날의 슬프고도 아픈 이야기를 어찌 남겨야 하나 고민이 됐다. 썼다 지웠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결국 처음 썼던 글로 되돌아 가고 만다.
안나푸르나 영봉들을 이미 만났기에 트레킹의 하이라이트는 지나갔다 생각했다. 하산길에 뭐 특별한게 있을까 싶었다. 열흘 넘게 걷다보니 이 깊은 산 속에서 걷는 일 자체가 즐거울 뿐. 오늘 걸을 길과 그 곳에서의 만남들과 풍경들에 대한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푼힐 전망대나 ABC 못지 않게 하산길을 걷는 즐거움이 크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날 우리 나라 산악사에 큰 별을 잃게 되는데... 뜻하지 않게 우리도 그 현장에 있게 되었다.(사진은 아이폰3GS 시절이라 화질이 좋지 않습니다.)
룸레 - 란드룩 - 고개 너머 포타나로 이어진 일정. 많이 내려온 덕분에 업다운은 심하지 않다. 마을과 마을, 논과 밭, 숲을 가로질러 평지 길을 많이 걷는다. 히말을 보는 것 만큼이나 즐겁고 신난다. 이 곳에 사는 이들에게는 척박하고 힘겨운 삶의 현장이겠지만... 트래커인 우리 눈엔 순수함과 소박함, 그리고 자연과 어우러진 이들의 삶에서 편안함과 치유를 느낀다.
11일차에 들어섰기도 하고 하산길이어서 그런지 여유를 많이 부린 것 같다. 오늘의 목적지는 트래킹 퍼밋션 체크 포스트가 있는 포타나까지인데 시간이 빠듯하다. 하루 종일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밀려온다. 하늘은 금새 어두워지고 비가 금방이라도 내릴 것 같다.
얼른 방수자켓을 꺼내 입고 배낭을 레인커버로 덮었다.
'우르르 쾅'
천둥번개가 치고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금새 길은 미끄러워졌고 속도는 떨어졌다.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오늘도 해가 지고서야 숙소에 닿으려나 보다.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문득 불안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멀리 마차푸차레 언저리로 비구름이 몰려간다.
분명 저 위는 비가 아닌 눈이 내릴텐데.... ABC에 올라가서 알게 된 것이지만 박영석 대장 팀이 안나푸르나 코리안 루트 개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걱정이다. 박영석 대장과 그 팀원들이 정상을 향해 가고 있을 텐데.
우리는 어둠 속에 포타나에 도착했다.
그 날, 밤새 비는 그치지 않았다.
하산을 하고 포카라에 돌아와 알게 된 소식이지만 박영석 대장과 그 팀원들이 바로 이 날 실종되었습니다. 폭설로 인한 기상 악화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분들이 남긴 도전 정신과 열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그 분들을 사랑했던 많은 분들에게 위로를 전하며 글을 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