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멈추는 번더, 번더에 파탄 방문기
어김없이 아침이 돌아왔다. 오늘도 학교 갈 준비를 한다. 네팔 말 열심히 배워야 되니까 싫어도 가자. 부지런히 챙겨 스쿠터를 끌고 나가려는데 경비 아저씨가 말린다. 오늘 번더랜다.
번더?
네팔엔 번더가 있다. 번더는 '닫는다'라는 뜻이다. 일종의 파업 같은 것으로 시위를 여는 주최 측이 어떤 일에 대해 정부에 항의를 하거나 자기들의 이익을 주장하고 알리기 위해 열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야 시위 장소가 특정지역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지만 네팔은 한 도시나 나라 전체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보통 번더가 있기 며칠 전 또는 하루 전엔 공지가 된다. 정확하게 어떤 메커니즘인지는 모르지만 네팔 사람들은 언제가 번더인지 다 안다. 번더 날엔 주로 도로를 점거하고 자동차, 오토바이, 심할 땐 자전거까지 다니지 못하게 막는다. 이를 어기고 차량을 운행 하다가 발각되면 수많은 시위대가 달려와 몽둥이와 돌로 쳐서 차량을 부순다. 심할 땐 사람이 다치고 차량이 불타기도 한다. 꽤나 위협적인 경우가 많아서 번더날엔 사실 집 안에 있는 게 좋긴 하다.
나라의 큰 수입이 여행객들로부터 들어오다 보니 번더날에도 Tourist가 쓰인 차량들은 통과시켜 주기도 하지만 어떤 날엔 여행객이 타겟이 되어 시위가 과격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집에 있긴 싫은데
네팔에서 보낸 시간이 늘어나다보니 번더도 여러 번 겪고 그러다 보니 이제 조금 간이 커져간다. 예전엔 집에서 숨죽이고 있었지만 전기도 인터넷도 안 되는 상황에서 집에만 있기엔 좀이 쑤셔 안 되겠더라.
"오늘 한번 나가볼까?"
아내를 쿡 찔러본다.
"오늘? 괜찮을까?"
"뭐 근처 나가보고 아니다 싶음 돌아오면 되지"
"그래? 그럼 어디 가게?"
"글쎄 큰 도로는 시위대가 많아서 위험하니 작은 골목 있는 대로 돌아가 보자!"
금기는 묘한 힘이 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왠지 해보고 싶다. 위험은 스릴이란 이름으로 금기 위에 설탕처럼 뿌려진다.
혹시라도 위험 상황에 놓이면 냅다 뛰게 가벼운 옷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물병, 신분증 같은 필수품만 백팩에 챙겨 들고 나왔다. 큰 도로가로 나가자 시위대인지 구경꾼인지 모를 인파가 여기저기 있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큰길을 활보한다. 보통은 차와 오토바이만이 다니는 길. 그 위를 걷는 이 느낌이 정말 낯설면서도 묘한 쾌감이 있다.
잠시 주변을 걸으며 분위기를 살펴본다. 오늘 번더는 나라 전체이고 시위 현장이 우리 동네는 아니다 보니 크게 위험은 없어 보인다. 그럼 어디로 가볼까? 고민을 하다가 파탄 덜발 스퀘어에 놀러 가기로 한다.
파탄 덜발 스퀘어 Patan Durbar Square
파탄 덜발 스퀘어는 옛 파탄 왕국의 왕궁 자리이다. 그 옛날 카트만두 밸리는 세 개의 왕국이 있었다. 카트만두 왕국, 파탄 왕국, 박다뿔 왕국(작은 땅에 왕만 셋... 백성들이 고생이다). 셋이 어떻게 잘 지냈는지는 모르겠고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파탄 덜발 스퀘어와 그 주변 동네가 옛 모습을 잘 지키고 있어(사실 발전이 무지 안돼서) 유네스크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다.
코 앞이 세계 문화유산인데 가봐야지.
번더 덕에 차 없는 거리를 만끽하며 파탄 왕궁으로 접어들었다. 매표소가 보인다. 매표원이 우리를 보고 다가온다.
"외국인은 매표해야 해"
"그래? 얼마인데? 우리는 여기 사는 사람인데?"
"인당 250루피. 여기 사는 증명서 있어?"
"여권에 비자 있지. 근데 여권이 없네."
"그럼 안되는데..."
"아니 여기 안 사는데 어떻게 네팔 말을 할 수 있겠어? 우리 자왈라켈 살아"
여권을 안 가져왔더니 일이 복잡해진다. 그래도 그동안 배운 네팔 말을 모두 풀어놓으니 그럭저럭 통과. 매표를 했다는 증명으로 스티커 하나를 가슴에 붙이고 입장을 했다.
2018년 현재 입장료는 1000루피/인 정도입니다. 예전처럼 '여기 사는 사람인데도' 통하지 않습니다. 네팔 물가를 생각하면 엄청 비싸네요. 2015년 대지진 때 많이 무너져서 예전처럼 구경할 거리가 없는데두요. 물론 저 입장료를 받아 복구를 한다고는 하지만 3년이 넘도록 거의 복원이 안되거 봐서는... 좀 아쉽습니다.
광장의 건물들은 기본적으로 힌두사원이다. 재미있는 점은 인도로부터 영향을 받은 힌두교와 석조 사원이 있고, 그 옆엔 바로 목조 사원이 함께 한다는 점이다. 인도의 경우 대부분의 사원이 석조인데 반해 네팔은 이처럼 목조와 석조가 섞여 있어 아시아 건축 양식이 변화하는 중요한 경계선임을 알려준다.
정말 신기하게도 광화문에 있는 해태가 여기도 떡하니 있다. 그 옆에는 소도 있고 코끼리도 있고 보면 볼수록 커다란 바위를 쳐서 깎고 또 깎아 저걸 만들어낸 장인들의 삶이 궁금하다.
돌뿐인가. 나무를 깎고 다듬어 만들어낸 정교한 기둥과 창살, 문틀을 보면서도 감탄하게 된다. 옛날부터 우리나라 교육은 '우리 조상들의 기술과 지혜, 그 예술혼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편인데... 사실 세계 여기저기를 다녀보면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지구의 모든 옛날 사람들은 다들 대단한 사람이었음을 느낀다.
광장 중앙에는 뮤지엄이 있다. 신경 써서 살펴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표지가 벽에 붙어 있다. 입구에는 고작 경비 한 명이 졸린 눈으로 지키고 서 있기에 사전 정보가 없다면 그냥 지나칠 만큼 세상 무신경한 박물관이다.
경비는 우리를 보더니 손짓, 눈짓으로만
'스티커 어딨냐?'
물어본다.
'옛다'
우리도 말 한마디 없이 가슴팍을 드리밀고 나서는 입장 한다. 네팔, 사랑스러운 면도 많지만 이런 건 좀 나아져야 할 텐데. 네팔에선 무슨 제복이든 제복을 입었다 하면 돈 내는 손님에게도 갑질을 하려한다.
박물관 내부는 옛 왕궁을 개조한 것 같다. ㅁ 자형 건물 내부 2,3층 홀을 전시공간으로 삼았다. 대부분 힌두교, 불교 신상과 관련된 서책 조금이다.
보고 있자니 어렸을 적 우리네 수학여행에서 방문했던 불국사나 석굴암이 떠오른다. 그 옛날 비행기도 없던 그 시절, 이 종교와 기술, 그리고 문화는 어떻게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이역만리 땅끝까지 왔을까? 그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 속이 아련해진다.
그렇게 한참을 옛 물건을 구경하고, 네팔의 역사를 보며 정원을 거닐다 밖으로 나왔다. 차도 오토바이도 사라지니 파탄 왕궁은 정말 그 옛날 파탄 왕국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대화 소리 만이 광장에 울려 퍼진다. 우리는 시간이 멈춘 이 순간을 즐긴다. 번더 덕분에 발견한 파탄의 진짜 모습이다. 모두들 가보세요!
번더. 사실 이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번더가 일어나면 보통 나라 전체가 스톱이니 말이다.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편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하지만 때로 번더 때문에 이렇게 다른 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하기도 한다.
파탄 덜발 스퀘어 구경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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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래킹 처음부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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