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그저 그런 사람들로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서로 미워하고 다른 이의 기쁨을 못 봐주고 심지어 타인에게 해를 끼칠 사람으로 만드신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평범하고 착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서로 존중하는 정도의 존재가 되는 것 만으로 만족하신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의도는 창세기 1장 26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창세기 1:26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듭시다. 그리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온갖 기는 것을 통치하게 합시다.”
창세기의 이보다 앞선 구절들에 따르면 모든 생물들을 지으실 때 하나의 원칙을 가지셨는데, 그것은 '제 종류대로 (according to their kind)'였다. 이런 원칙을 알았고, 신앙을 지니고 성경의 배움이 있었던 린네(Carl Linnaeus)와 레이(John Ray)는 종의 분류법을 제시하여 생물 분류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무엇이 종을 구분 짓는가? 모양(likeness)과 형상(image)이 다를 때 다른 종이 된다. 형상은 어떤 존재의 내적 속성의 표현이고 모양은 외양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토끼와 호랑이를 놓고 보자. 바깥 모양이 다를 뿐 아니라 그 생김새에서 토끼는 온화함이, 호랑이에서는 용맹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두 생물이 주는 이미지가 각각 다르다. 아무도 토끼를 보고 무서워 벌벌 떨지는 않겠지만 호랑이를 마주 대한다면 오금이 저릴 것이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각종 채소, 과수, 물고기, 새, 곤충, 동물들은 다 각기 종류대로 지어져 고유의 형상과 모양을 갖게 되었다. 이런 흐름대로라면 여섯째 날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제 종류대로 지으셨다고 말하셔야 했다. 그런데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어조를 달리하시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람은 무슨 종(種)으로 창조된 것일까?
이렇게 사람을 지으신 후 그들에게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땅을 정복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살아 있는 온갖 것을 통치하여라.”라는 위임을 주셨다. 이렇게 사람은 창조 당시부터 하나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매우 밀접한 관계로 지어졌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위임을 저버리고 타락하게 되었다. 이어서 거짓말을 하고 질투하고 살인을 저지르며 마음에 생각하는 것마다 악하기만 할 정도록 타락하게 되었고 심지어 하나님을 대항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자 하였다. 이것이 창세기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일이었다.
수많은 죄들 가운데 타락한 인류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신다.
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다. /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 나를 저버렸고 / 자기들을 위해 저수조들을 팠는데 / 그것들은 물을 담아 둘 수 없는 / 새는 저수조들이었다.
우린 수많은 죄들을 열거하며 우리가 얼마나 악한 자들인지 말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 눈에 이 모든 것은 증세들이고, 그 근원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것 때문이요 하나님 아닌 데서 그들의 목마름을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 죄악 된 것의 결과는 사망을 가져왔다.
우린 흔히 힘들어 죽겠다. 피곤해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는 말을 사용한다. 기쁘지 않고 암울하고 무기력한 것은 이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증거들 중 하나이다. 죄의 결과 우리에게 온 이 사망이 하나님에게 또한 크나 큰 원수이다.
죄가운데, 사망의 그늘 아래 있는 우린 다른 한 면에서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으며 하나님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우리의 인생이 비정상적인 양태(樣態)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 없는 삶은 고되고 어둡고 심지어 공허한 일생이다.
이런 하락 가운데 있는 사람이 다시 하나님께 돌이키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사람을 지으신 원래의 목적을 이루시도록 할 길은 없는 것일까?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어둠은 사라지고 기쁨과 안온한 마음으로 가득 찬 살맛 나는 인생을 살 길은 없는 것인가?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이 죄스럽고 불가능하기만 한 것일까?
로마서 3:25 그리스도 예수님의 피로, 사람의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드러내시어 화해 장소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사람들이 지은 죄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면서 지나쳐 가심으로 그분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며,
인디아나 존스의 레이더스에서 성궤가 나오는 장면을 보신 분들은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는데 이 언약궤라고 불리는 성궤는 구약의 성막의 지성소 안에 놓였고 성궤의 위에 속죄소, 속죄덮개로 불리는 화해장소가 있고 그 위에 두 그룹(cherubim: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천사)이 얼굴을 마주 대하며 속죄 덮개를 바라보고 그 날개들은 속죄 덮개를 덮었다. 구약에서는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에 들어가 속죄 덮개 위와 앞에 제물들의 피를 뿌림으로 속죄하여야 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진노가 가라앉혀지고, 하나님과 사람은 화해를 이루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사람은 이끌리는 것이다.
이 속죄덮개, 다른 표현으로 화해장소를 헬라어로는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이라고 한다. 로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이 화해를 이룰 수 있는 장소라고 말하고 있으며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제물들의 피를 뿌렸지만 주 예수님은 흠이 없는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로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산길을 열어 놓으셨고, 화해장소이신 주님에 의해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죄들과 악함과 심지어 우리의 존재 자체의 그릇됨 모든 것을 주님께서 처리하심으로 우리로 진정한 화해를 이루셔서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영광의 임재 안으로 이끄시어 그분과 깊은 교통을 갖게 하실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인류의 가장 큰 문제였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인류의 가장 큰 고통이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저주이다.
힐라스테리온, 하나님 앞에 인류의 문제가 해결된 장소이다. 힐라스테리온,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화해장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말마암아 우린 하나님께 나갈 수 있고 영광의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에게 열린 길이다. 당신이 착하든 악하든, 학식이 많든 적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상관이 없다. 당신의 마음을 열고 어둠 가운데, 사망의 그늘가운데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원의 주로 받아들이시라.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