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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무 Sep 14. 2020

신뢰

 인턴 때 일이었다. 호흡기 증세를 호소하며 응급실에 온 아기를 진찰한 후 흉부 방사선 촬영을 하고 소아과 레지던트 선생님을 콜 하였다. 환자에 대해 일차적으로 충분히 파악하지 않고 콜 하면 혼나곤 하였기 때문에 나름 충분히 환자에 대해 검사까지 다하고 호출 한 것이었다. 소아과 레지던트 선생님께서 내려오셔 환아를 보고 보호자와 대화한 후 약 처방전을 내고 그들을 보낸 후, 뒤돌아 대기하고 있던 내게 오셔서 대뜸 말씀하셨다. "이선생, 당신 아이 같으면 흉부방사선 촬영했겠어" 이 한 마디 하시고 올라가셨고 의사생활을 막 내디딘 초년생으로서 당시 소위 '탄' 느낌을 한동안 갖게 되었는데, 그 선생님이 태운 깊은 뜻은 훗날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방사선 촬영으로 인한 이득은 진찰에서 파악하지 못한 환아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일 것이고 해로움은 방사선에 노출로 인한 피해일 텐데 전자의 이득이 후자의 해보다 상회할 상황이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상황인데 왜 촬영을 했냐는 호된 꾸지람이었다. 이는 수련 기간 동안 내 안에 깊이 새겨진 배움이 되었다. 35년 전의 일이다.


  의료계를 둘러싼 변화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과 같이 그 이후 현저한 변화를 겪었다. 내가 수련받던 때는 혈액 투석을 받아야 할 어떤 만성신부전증 환자는 고가의 의료비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S대학병원의 K 교수님은 신장내과의 대가이셨는데, 만성 신부전증 환자를 진료하게 되면 냉정하게 대하는 것으로 유명하셨다. 이 환자들이 적극적인 치료를 받게 되면 가산을 다 탕진하게 되고 남은 가족들에게 가난을 물려주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 K교수님이 몹시 야속하게 느껴졌었는데,  이런 태도를 취하셨던 그분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계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많은 세월을 산 지금은 든다.  이제는 필수적인 진료를 고가의 비용이어서 치료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는 당시와 비교 시 현저히 줄어들었다. 반면에 건강보험은 행위별 수가를 시행해 옴으로써, 즉 모든 의사의 진료행위 하나하나를 청구 금액으로 환산해 놓아 상품 서비스받는 식으로 점차 변화되게 되었다. 또 진료 중 환자의 경과가 좋지 않게 되면 의료현장에서의 다툼과 갈등이 심하게 되어, 심지어 환자가 암 진단을 받게 되면 보호자가 의사 면담 시 녹음기를 사용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의사들은 방어진료를 하게 되는데, 환자를 진료함에 있어서 환자에게 있을 수도 있는 해로움과 의사가 행하려 하는 진료적 중재로 인한 이득을 저울질하여 판단하는 것보다 최대한 책임을 회피할 진료가 더 우선시된다면, 당장에 보이지 않을 해로움이지만 훗날 그 환자에게는 불이익이 갈 수도 있는 진료들이 행해질 수도 있게 된다. 예를 들어 CT나 혈관조영술과 같은 방사선 검사들은 노출되는 방사선 양을 고려하면 이득이 더 클 때 시행하여야 하는데, 지금의 의료환경은 환자입장에서 순수하게 득실을 따질 수 있는 의료 현장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걸쳐 신뢰는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며 의료계를 둘러싼 사회의 신뢰도 우리나라 안에서는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높은 편이지만 외국과의 비교 연구결과를 보면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낮은 신뢰 수준이 형성된 것은 복잡한 선행 요인들이 수십 년간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한두 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고 한두 가지 개선해서 회복될 문제는 아니나, 낮은 신뢰로 인해 지불해야 할 사회적 비용과 고통과 불만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이런 것이 보이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 하며 살면 좋겠는데 이 모든 것들이 내 눈에는 보이니 어찌하랴.


 내가 보고 싶은 미래의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것이다. 우리 손주들이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될 때, 의사 선생님께서 우리의 아이의 문제를 신중하고 사려 깊게 진찰하신 후 이러한 질병들이 의심되니 일련의 특정 검사들을 시행하여야 하고 그래서 저 질병이 진단되면 이러저러한 치료를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하면 "네, 선생님 그대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의료 시스템 말이다. 어떤 대학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아도 다시 전화로 어느 병원에 가야 하냐고 물을 필요가 없는, 그래서 길에서 방황하는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없는 그런 의료환경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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