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무 Sep 16. 2020

잃으면 얻는 것

 세계 각지를 탐방하는 방송 프로그램 중 하나를 보았는데, 어느 유명한 장소가 언덕 위에 있어 언덕길을 힘들게 걸어 올라가며 촬영 중에, 백발의 노인이 그 길을 오르고 있는 것을 보고 촬영진이 "연세가 꽤 되셨는데 힘들지 않으시냐?"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분의 답변이 “젊어서부터 오르던 길이야, 그때는 십 분이면 올라갔는데, 지금은 더 걸리지, 그런데 천천히 올라가면 못할 것이 하나도 없어.” 대략 이런 흐름의 답변이었다. 그 방송을 찾아 다시 들을 수 없어 기억에 의존해 대략 그분의 답변을 기록해 보았다. 이 말이 뇌리에 박혔다. '천천히 하면 못할 것이 없어'라는 말이 특히 인상 깊었다.


 한 번은 파킨슨 병에 걸린 여의사가 쓴 글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분은 달팽이가 큰 집을 짊어지고 다니는 기분이라고 하였다. 천천히 걷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데 기묘한 것은 평소 보지 못하던 많은 것들이 보이고, 비 온 후 빗방울 맺힌 것 하나하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랐다 라는 글이었다. 이와 유사한 체험을 아내가 발목 골절을 입은 후 한 적이 있었다. 회복기에 상당기간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했는데, 답답하고 제한적인 환경을 벗어나 근교 다산 생태공원이나 고모리 저수지 둘레길을 걷곤 하였다.  이때 주변의 야생화 하나, 풀 하나가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다. 그런데 그 후 회복이 되고 정상적인 걸음으로 걷게 되니 그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려 해도 쉽지 않았다. 당시 어쩔 수 없이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젠 그렇게 천천히 걷기엔 성질들이 너무 급했다. 그러다 보니 그때 보이던 것들이 이젠 잘 보이지 않는다.


 수년 전 5개월 정도를 직업이 없이 쉬어야 했던 기간이 있었다. 다니던 연구소를 그만두고 나왔을 때 여기저기서 와 달라고 구름같이 몰려올 것 같았는데 주변이 적막하기만 하였다. 그때 대학생 때 취미로 찍었던 사진을 다시 찍기 시작했다. 혼자 국립 수목원이나 인제 자작나무 숲, 강원도 곰배령, 양평 두물머리 같은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는데 다람쥐와 친구가 되기도 하, 꽃이 살랑거리며 인사하는 길을 정감 어리게 누리며 다녔다. 자연의 한 장면을 보아도 인상 깊고 작품이 될 것 같아 셔터를 눌러대었는데,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오니 그때만 못하다. 여전히 자연 속을 걷는 것이 좋지만 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주진 않으시나 보다. 하나를 가져가시면 다른 하나를 주시고, 다른 하나를 주시면 또 다른 어떤 것은 가져가 버리신다. 우리 주변에 천천히 하면, 여유를 갖고 보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들이 많건만  바쁜 마음과 많은 것으로 채워진 우리들의 마음으로 귀한 것을 스치며 지나가버리는 것은 아닌지. 채워진 사람들은 갖지 못할 무언가 귀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가던 길을 돌아본다.


영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3)


이전 03화 신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