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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원천

현대 의학에서 밝혀진 내 몸, 나의 삶(4)

by 이상무

긍정적 생각과 삶의 이유가 뚜렷하고 기쁨과 행복한 마음을 가질 때 그렇지 못한 사람과 비교해 보면, 온갖 바이러스와 세균감염에 대한 위험을 줄이거나 감염병에 걸리더라도 사망률을 줄인다는 것에 대해서 의학적인 확실한 근거가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고, 심지어 암으로 인한 사망률도 줄일지 모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긍정적 정서 반대쪽에는 염려와 근심이 있고 그것이 더 깊어지면 무기력함과 우울과 깊은 절망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부정적 정서는 염려와 근심에서부터 시작되어 발전한다. 염려와 근심은 어디로부터 오며 기쁨과 행복은 어디서 생기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우리는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진지하게 탐구해 보고 결론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은 우리 일생을 좌우할 문제가 아니겠는가?

국립국어원에서 제공하는 표준국어 대사전에 따르면 염려는 "앞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걱정함. 또는 그런 걱정"이라 말하며 근심에 대해서는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경의 번역 용례로 보면 염려는 주로 'anxiety', 'care', 근심은 'dejection', 'distress', 'troubled heart', 'sorrow'를 번역할 때 사용되곤 하였다.

두 단어가 비슷한 것 같지만 '염려'는 현재와 미래에 결정되지 않은 불확실한 상황가운데 자신에게 닥칠 원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한 마음의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근심'은 발생한, 쉽사리 해결되지 못할, 앞으로도 전개할 수 있는 좋지 않은 상황으로 인하여 마음이 어려운 것을 묘사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염려와 근심이 강하게 오면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이에 반응하여 우리 몸의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고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어 심박수 및 혈압 증가한다. 이러한 스트레스가 만성화되면 면역 기능이 전반적으로 저하되거나 균형이 깨뜨려지고 동맥경화가 촉진되고 기억과 학습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 부분에 신경세포의 손상을 유발하여 기억력과 집중력이 저하된다. 또한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을 초래하여 수면장애가 유발되기도 한다. 또한 지속적으로 혈당 상승시킴으로 인슐린 과다분비를 유발하고 인슐린 저항성도 높아져, 제2형 당뇨병 발병 가능성이 올라간다. 이외에도 자율신경으로 조절되는 소화기관의 기능 저하나 불균형을 초래되어 소화기질환을 발생시킬 수 있다. 스트레스가 위기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위한 우리 몸의 적응 생리기전이긴 하나 부적절하고 균형 잡히지 못할 때 득 보다 실이 많게 된다.


이 땅에서 주예수님께서 사람들과 만나시고 대화하실 때 그분은 사람에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죄악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염려와 근심임을 아셨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고 하며 염려하지 마십시오.(마태복음 6:31)"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사람의 중심에 염려가 있기 때문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염려가 많은 것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며 내버려졌기 때문이다.(마태복음 9:36)"라는 말씀과 같다.


사람은 왜 염려하며 근심에 이르게 되는가? 그 사람의 참된 필요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린 인류의 시작점으로 가볼 필요가 있다. 태초로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을 '에덴에 동산을 만들어 놓으시고, 지으신 사람을 그곳에 두셨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땅에는 보기 즐겁고 먹기 좋은 온갖 나무를 자라게 하셨고,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라고 하셨다. 그 동산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선과 악의 지식나무도 자라게 하셨는데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는 먹어서는 안 되고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도 말씀하셨다.


에덴은 히브리어 원어로 'עֵדֶן'(에덴)이라고 하는데 기쁨, 희락이란 뜻을 지닌 단어라고 한다. "온 지면 위에서 씨 맺는 온갖 푸성귀와, 씨 있는 열매 맺는 온갖 나무를 너희에게 주었다. 이것들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라고 하심으로 그 사람의 온갖 필요를 채워 주셨다. 당시 에덴엔 추위와 극한 환경이 없었고 먹을 것에 대한 부족도 없었다. 노동의 수고도 없었고 그들의 모든 필요는 에덴에서 산출되었다.


기쁨과 희락의 에덴동산에는 각종 나무에 실과가 열렸고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외에는 모든 실과를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는데, 이 에덴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 (the tree of Life)가 있었다. 이 생명나무가 무엇인지에 신비롭기만 한데 많은 앞선 신실한 믿는 이들, 성경학자들은 이 나무는 '영원한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상징하며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이 곧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성경은 1600여 년에 걸쳐 걸쳐 사십여 명이 기술하였음에도 불고하고 놀랍도록 조화와 일관성과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하는데 성경의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마지막 때에 구원받은 자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사람이 이 땅에 썩어 없어질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신 주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분만을 우리의 모든 공급으로 취하여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를 먹음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고 너는 일생토록 수고를 해야 땅의 산물을 먹으리라. 땅은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고 너는 들의 푸성귀를 먹으리라. 너는 땅에서 나왔기에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으리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창세기 3:17-19)”라는 하나님의 판결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인류는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해 수고하여야만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살인과 거짓말을 하게 되자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네가 땅을 경작하여도 땅이 너에게 더 이상 그 효력을 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땅에서 도망 다니며 방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땅이 소산을 내기에 그리 녹녹지 못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타락한 인류의 역사를 요약하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킬 때 환경이 좋아지고 어느 정도 회복되나 죄악이 관영해지면 다시 하늘과 땅이 그들을 도와주지 않게 되며 기근과 고통의 환경이 닥치게 되는 것이 지난 수천 년의 인류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염려와 근심은 발생한다. 즉 하나님을 떠난 것이 사람에게 염려와 근심이 생기게 된 근원이라는 말이다.


이제 지난 글에서 던진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빌립보서 4:4)" 우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직장을 잡기 힘든 이 새대에서 취업을 앞둔 청년들이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언제 명예퇴직을 해야 할지 모르는 50대 가장에게 깊은 근심이 서려 있지 않을 수 있으며, 모든 것을 다 가져 살만할 때에 죽음의 그늘이 서린 질병이 찾아왔을 때 그 누가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속절없이 항상 기뻐하라고만 하는가?


BC626년 전쯤 하박국(Habakkuk)이란 선지자는 "무화과나무가 싹을 내지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나무에 들인 수고가 헛일이 되고 밭이 양식을 내지 않더라도, 우리에 양 떼가 끊어지고 외양간에 소 떼가 없을지라도, 저는 여호와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제 구원의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렵니다. 여호와 주님은 저의 힘이시니 그분은 저의 발을 암사슴의 발처럼 만드시고 저를 저의 높은 곳들로 걷게 하실 것입니다. 지휘자를 따라, 나의 현악기에 맞추어.(하박국 3:17-19)"이라고 말하였다. 이 정도가 되지 않고서는 항상 기뻐할 수 있겠는가?


금세기말 중국에 실로 놀랍고 신성한 계시에 대해 탁월한 이해를 갖고 수많은 믿는이 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준 신실한 믿는 이 워치만 니(Watchman Nee:중국에서 1952년 투옥된 후 1972년 순교)에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떡이 생기냐 밥이 생기냐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을 믿으면 당신이 밥 먹던 그 밥그릇까지 깨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땅의 물질적인 축복을 바라는 종교적인 사람들의 그릇된 관념을 깨뜨리는 깊은 믿음에서 나온 사랑의 권면의 말이었음을 그가 깨달았을까?


사람의 염려와 근심은 얻을 것을 얻지 못할 것 같거나 그리 되었을 때 찾아온다. 그럼 사람의 참다운 필요는 무엇인가? 돈인가? 학문적 실력인가? 타인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인가? 맛있는 음식인가? 육체의 쾌락인가? 인류 역사는 그런 썩어 없어질 것들은 일시적인 우리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지만 깊은 속의 근본적인 참된 필요는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인류의 참된 필요는 그를 지으신 분, 그를 사랑하시는 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요, 하나님과 정상적인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거하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이다.


찾을 것을 찾았고, 얻을 것을 얻었고 참으로 담아야 할 것으로 채워졌을 때라야, 이러한 깊은 체험과 인식이 마음판에 새겨 졌을 때에라야 '무화과나무가 싹을 내지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나무에 들인 수고가 헛일이 되고 밭이 양식을 내지 않더라도, 우리에 양 떼가 끊어지고 외양간에 소 떼가 없을지라도' 항상 기뻐할 수 있다.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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