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 사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안고 시작한 미국 의대 생활은 겉보기엔 나름 평탄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어엿히, 대학교 기숙사나 군대 내무반이 아닌, 나만의 작은 아파트 스튜디오 (한국으로 치면 원룸)에서 거취를 하게 되었고, 다행히도 내가 다닌 의대는 시카고라는 미국에서도 꽤 큰 도시에 있었기에,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와는 다르게, 그나마 도시생활의 이점을 많이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내가 겪어왔던 유학생활보다는 훨씬 더 한국 속 도시생활과 비슷한 점이 꽤 많았고, 하루하루 생활하기에 꽤 수월한 점도 많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 속내는 꼭 그렇지는 않았다. 근본적으로 10대 후반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했던 나에게, 비록 나 스스로의 선택과 도전으로 미국 의대에 지원하고 운이 좋게도 합격하여 진학하게 되었지만, 막상 그 기나긴 의대 교육과 의사로서의 수련과정, 그리고 그 후의 의사생활을 미국이라는 (아직도) 타지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함이 계속 앞섰다.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이 한국에 남아있어서였을까, 아님 나의 향수병이었을까, 난 항상 내 정신적 연고지는 한국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가 왜 미국에서 의대공부를 해 나아가야만 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정체성의 고민은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의대 공부에도 영향을 끼쳤다. 주변 의대 친구들은 사실 정말 내가 그때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친구들보다도 똑똑했을 뿐만 아니라, 그 노력과 열기가 대단했는데. 그렇게 노력과 두뇌가 뭉친 친구들이 그 방대한 양의 의대 공부를 차근차근해 나아가는 모습은 옆에서 보기엔 그들에 비해 뒤쳐질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 그에 반해, 나 스스로는 그 한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나에 대한 많은 생각들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그러한 시간들이 공부 외적으로 나를 심리적으로 지치게 만들어 갔다.
과연 나는 정말 미국에서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정말 의사가 되고 싶긴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미국이어야 할까? 아니면 한국에서 의사를 하는 방법은 없을까? 정말 지금 돌이켜보면 밑도 끝도 없을 수 있는 그러한 고민들은 끊임없이 했고, 그 답 없는 질문들은 나 스스로를 점점 지치게 하고 외롭게 만들어 갔다.
왜 또 그렇게 시카고의 겨울은 추운지. 여름과 가을이 지나 겨울로 접어들면서, 그 긴 시카고의 겨울 내 고민의 깊이는 더해져 갔다. 이렇게 힘들어도 괜찮을 것일까? 몇 년 전만 해도 난 지금 그 자리에 있고 싶어서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고민하고 노력해서 여기까지 온 건데, 난 과연 무엇을 향해 그렇게도 노력했던 것일까? 혹시 남들이 멋있어 보인다는 의대, 그것도 미국에서 다니는 의대, 그게 멋있을 것이라는 허영심은 아니었을까?
정말 끝도 없지만, 내가 공부를 왜, 그리고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 내 머리를 가득 채웠고, 그래서 나는 점점 힘들어졌다. 그 와중에 의대 공부는 점점 더 어려워졌고, 마음은 더 흔들흔들거렸다. 남들은 이제 전속력으로 매진하는 의대 공부라는 그 큰 산 앞에서, 나 스스로의 모습은 너무나도 작아진 듯했고, 자신이 없었다.
"나는 과연 어디에 속한 사람일까? 아니, 어디에 속해야 하는 사람일까?"
생각보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찾기는 쉽지 않았고, 그 길 또한 참 긴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