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개월의 군생활을 마칠 즈음, 난 이미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온연히 회복했고, 언제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유학생활을 했었냐는 듯, 남들이 보기엔 남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완전한 한국청년 (또는 군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군생활이 힘들었다고 할지라도, 이따금씩 주어지는 휴가 기간, 한국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친숙함이 너무 행복했다고나 할까. 어디에서나 외국인처럼 튀어 보이지도 않았고, 먹고 싶은 음식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가족도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이란 나라 안에서의 20대 청년이 즐길 수 있는 문화과 기회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고 좋았다.
특히 2009년 5월 중순 전역을 한 뒤 7월 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 사이의 2개월여의 시간은, 정말 행복하게 살았던 것 같다. 더 이상 군대에서 처럼 각종 규율들이 나를 구속하지도 않았고, 진로에 대한 고민도 아직은 별로 없었으며, 주위에서 사람을 만날 때면, 사람들은 미국에서 의대를 진학하게 될 사람이라면서 나를 띄워주기도 했다. 그저 그렇게 모든 것이 별 특별한 어려움 없이 물 흐르듯 흘렀다.
그러게- 난 그렇게 고민 없이 사는 것이 너무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왜 미국을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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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었던 그런 의문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학생활 전부를 쏟아가며 도전했던 미국 의대 진학의 꿈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불구하고, 난 생각했던 것만큼 아주 많이 행복하지는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유학생활동안 친해진 한국 친구들은 대부분 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몇몇 친구들은 나처럼 한국에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귀국한 경우도 있었고, 그중 몇은 한국에서 로스쿨이나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기도 했다. 또 우연치 않게, 내가 군에 있을 당시, 2008년 경제위기가 닥치게 되었고, 많은 유학생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이 아닌 한국으로 돌아와 취업을 하거나 커리어를 시작하는 경우도 꽤 많이 있었다. 결국 2000년대 초반, 유학의 물결을 타고 미국에서 같이 공부한 많은 주변인들은 대부분 다 한국에 정착을 해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점점, 출국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는 제2의 유학길을 떠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고등학생 때 첫 유학길을 떠날 때처럼... 나에게 친숙한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혼자 다시 새로운 세계로 무언가를 좇기 위해 떠나는 길처럼 말이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조금씩 털어놓기도 해 보았다. 미국 의대에 합격한 것은 너무 감사한데, 그럼에도 난 사실 정말 미국에서 살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결국엔 무엇을 위해서 미국에서 의대를 가려고 했던 것일까? 나는 한국에서 가족과 친구들 가까이 그 안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면서 커리어를 쌓고 싶은데, 그런 길은 나에게 정말 어려운 것일까?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은 나만이 스스로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이었고, 그 대답 또한 누구도 나 대신해 줄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어려운 질문들은 점점 쌓여만 갔고, 그에 대한 답변은 하나도 구하지 못한 채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그리고 그 해 7월 말,
2년만에 나는 다시 미국 땅을 밟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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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국이어야 하는가?"
사실 이 질문은 의대 재학 시절 내내 나를 짓눌렀다. 무엇이었을까. 남들이 가고 싶다는 의대를 미국에서 재학하면서도, 나는 항상 외로웠고, 내 마음은 항상 한국에 있었다.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10년이 넘어가던 시기임에도, 난 항상 이 질문을 되뇌었다. 나는 왜 미국에 있어야 하는가.
무언가 좀 더 구체적인 목표를 갖고 미국에서 의사로서의 꿈을 꾸었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좀 더 일찍 명확하게 하고, 내 정체성에 대해 덜 고민했을까? 내 주변 대학원으로 유학을 온 다른 한국 유학생들을 보면, 목표가 뚜렷했고 흔들림이 없어보였다 (그들은 보통 한국에서 학부를 마치고, 뜻이 있어서 미국 유학을 온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난 학부생 때 미국 의대 "합격"에 대한 원대한 꿈은 품었지만, 막상 "왜"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의사로서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 그 궁극적 정체성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의대 재학 중 순간순간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내가 왜 모국이 아닌 타국에서 의사로서 수련의 길을 택했나 스스로 원망과 자책도 많이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돌이켜봐도, 이 질문들은 어렵다. 그 당시 이 고민들은 나에게 정말 어떤 의미였을까.
미국에 사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님 한국에 대한 향수병이었을까? 한국을 핑계삼은 미국에서의 현실 회피였을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공부를 목적으로 한 유학생활과 삶의 터전을 내려야 하는 이민생활의 그 사이 과도기였을까?
어찌됐건,
걱정없이 행복했던 한국에서의 2년을 뒤로한 채,
이렇게 꽤 어려운 고민들과 함께,
2009년 무더운 시카고에서의 여름,
나의 의대생활, 그 기나긴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