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대학교 졸업식을 참석하지 못했다. 날짜가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졸업일과 입영 날짜 사이가 너무 촉박해서 졸업식 행사에 참석할 여유가 없었고, 결국 짐을 학교에서 먼저 정리한 뒤 한국으로 귀국했었다. 아무리 내가 원하는 미국 내의 의대 진학이 확정되고 2년 뒤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이 정해진 상태였다 할지라도, 막상 입영날짜가 다가오니, 난 졸업의 후련함보다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아마 한국에서 군대를 가야 하는 모든 남자들이 겪는 그런 심정이었겠지..
입영일의 그 느낌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6월 땡볕 아래, 논산 육군훈련소 연병장에 퍼지는 그 발구름 소리와 흙먼지. 내 머리는 너무 짧아서 어색했고, 그 더운 날씨에 빨간 모자 조교들의 그을린 피부, 찢어진 눈빛을 숨어 올라오는 긴장감. 막상 씩씩하게 들어왔지만, 들어온 순간 느꼈다, 아 이제 여기는 정말 바깥과는 다른 곳이구나 (난 이제 망했다는 엄습감도)
사실 군생활이란 게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이 거치는 과정인지라, 뭐 내가 그렇게 특별한 군생활을 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돌이켜 보면 인생의 많은 부분을 타국에서 생활한 내 인생에 있어 하나의 큰 기점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나의 정체성과 인생의 여정에 있어서 중요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내가 지원해서 간 보직은 경리행정병이었기에, 전투부대가 아닌 행정부대에서 사무직 일을 주로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특히 주간 근무를 하는 환경이 경리사무실 안에서 간부들과 군무원들, 즉 그 사이에서의 한국 회사 생활 비슷한 것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비록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지만, 고등학교와 대학교 교육을 미국에서 마친 상황이었기에, 그 한국 오피스의 사내 문화란 건 새로운 것이었고, 처음 제대로 배워보았던 시간이었다. 직장 상사 (간부)들을 대하는 자세와 행동. 또 후임을 대할 때의 선임으로서의 내 리더십과 포용력. 그 시기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나에겐 그렇게 한국의 조직 또는 사내 문화를 간접적으로 나마 경험해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간 근무 시간 외에 내무실에서 생활하는 한국 군대의 군생활은 마냥 쉽지는 않았다. 나는 유학을 떠난 시기가 꽤 늦었기에, 항상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완연한 한국인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군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다행인 것은 워낙 내가 겉으로 내 감정을 많이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고 시키는 대로 잘하는 편이기에, 아마 다른 사람들은 잘 몰랐을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잘 생활하고 적응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그 속내는 군생활 초반부에 적응하는데 좀 힘들었던 것 같다.
사실 그 어떤 특정 무언가가 문제가 있었다고 콕 집어서 말할만한 것도 없다. 아마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다 겪어보았을 만한 그런 일반적인 경험일 수 있겠지만,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은 내 성격과 외국에서 수년을 생활하다 돌아온 상황이 결합되어서인지, 그 단체생활과 병영문화가 힘들었던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말 이등병 때는 2년 (정확히는 23개월)의 시간이 너무나도 더디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내 사무실 컴퓨터에 앉으면 누가 만들어 놓은 전역일 계산기라는 사악하고 앙증맞은 어플 같은 게 있었는데, 달팽이처럼 1일씩 움직이는 D-day숫자를 보는 내 심정은 정말 숨 막힐 듯 답답했다. 또 내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온 유학생이란 사실도, 처음엔 주변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부분이었는지 이것저것 물어보고 관심 가져주고 했지만, 그마저도 한두 달이 지나고 나니, 나 또한 그저 다른 신병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이등병이었고, 그렇게 단체 속에 점점 일개의 병사로 묻혀갔다.
그럼에도 결국 사람이란 존재는 환경에 적응을 하게 마련인 것일까?
나는 그 안에서 조금씩 "짬"이 생기면서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내어 가기 시작했다. 아침엔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출근해서 조용한 나만의 시간도 만들어 보았고, 저녁식사를 하고 나선, 내무실 생활을 피할 겸 체력단련장에서 시간도 보내곤 했다. 점호시간이 지나면, 자기 전에 혼자 독서실에 가서 책들을 읽고, 주말엔 인터넷 방에서 웹서핑을 한다던가 또 CD플레이어로 음악도 듣기 시작했다 (보안 문제로 MP3나 다른 기기들은 가져올 수 없었고, 이 또한 허가가 필요했다). 그렇게 군 생활 안에서도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점점 만들며 나의 생활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그 당시 내가 발견한 관심사는 재즈 음악이었다. 사실 내가 재즈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때 생화학 실험실에서였다. 실험실 지도교수님이 좋아하는 음악이 재즈였는데, 그래서 나와 내 동료학생들이 실험을 할 때면 교수님과 함께 재즈음악들을 함께 듣곤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는 Dave Brubeck이라는 뮤지션의 음악에 나도 모르게 빠져 들었던 것 같다 (유명한 곡으로 그 당시 한국 통신사 광고로 나오던 Take Five라는 곡이 있다).
그러다 보니 재즈음악은 군생활에 있어서 내 마음의 해방구 역할을 해주는 느낌이었다. 뭐라 그럴까, 그 무엇 하나 내 맘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군대 안, 그리고 그 수많은 규율들 사이에서, 나 혼자 이어폰을 꽂고 미국에서 듣던 재즈 음악을 듣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그 재즈의 자유로운 영혼으로써 마음이 뚫리는 대리만족의 기분이었다고 할까. 난 이미 알고 있던 Dave Brubeck의 음악으로 시작해 점점 다른 한국과 미국의 연주자들도 찾아보기 시작했다. 특히 그중에서 재즈 속의 피아노 연주를 많이 좋아하곤 했었다. 정말 막 치는 듯한 그 빠르고 자유로운 연주 속에서 앙상블과 감동을 선사하는 재즈 속의 피아노는 나를 흠뻑 매료시켰다. 지금도 기억나는 음악은 Arturo Sandoval이라는 트럼펫 연주자가 발매한 [My Passion for the Piano]라는 피아노 앨범이 있었는데, 그 음반은 정말 닳고 닳도록 들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아마존으로 미국에서 한국 집에 주문했었다). 어떻게 저렇게 피아노를 칠 수 있지? 본업은 트럼펫 연주라는데, 피아노 연주를 어떻게 저렇게 잘하지? 언젠가 한번 저 사람 저 연주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렇게 내 군생활은 재즈음악과 독서, 그리고 조금의 체력단련 운동으로 채워져 갔고, 그렇게 시간도 조금씩 조금씩 서서히 흘러갔다.
얼마 전 운전을 하고 가는 길, 딱히 듣고 싶은 음악이 없어서 예전 플레이리스트 속에서 이곡 저곡들을 꺼내어 돌려 보았다. 그리곤 우연히 멈추게 된 Arturo Sandoval의 피아노 곡들. 오랜만에 다시 들어보았다. 정말 숨 쉬지 못할 정도의 흡입력 있는 그의 연주는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들어도 너무 멋졌다.
더욱이, 그 음악들은 그때 그 당시 군대 안 독서실과 내무반에서 그 고물 CD플레이어로 듣곤 했던 군생활의 기억들을 촤르륵 회상시켜 주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그때 군생활 시절엔, 이것저것 힘들고 답답하다고 불평이 많았지만, 지금에 와서야 생각을 해보면, 그때만큼은 정말 미래의 진로에 대해서만은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내 인생의 유일한 시기였다. 물론 그 당시 군대 안에는 전역 후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하고 준비하며 공부하는 동료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나는 감사하게도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이 다 짜여 있는 상황이었고, 2년 정도의 군생활 안에서 내가 무언가 발버둥 치며 의대생활을 걱정하고 준비하는 것도 필요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래의 고민 보단 그때 그 현재를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 당시 나는 몰랐다. 그저 난 군생활의 답답함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고, 그렇게 전역만을 기다리면서 생활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미래의 고민 없이 현재만을 살아가도 되는 시기가 또다시 오진 않으리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보면, 그 순간의 행복, 또 그리고 소중함들을 잊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정말 처절히 힘들고 외로울 것만 같았던 순간들 마저도 되돌아봤을 때엔, 그 안에서의 행복과 소중함이 항상 있었던 것 같은데, 왜 그 순간순간에는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했을까.
삶의 행복이라는 것이 꼭 대단한 것이 아닌 그 하루하루 삶 속에 있기 마련인데, 왜 그 당시에는 그 소소한 순간의 행복들을 미처 알지 못하고 돌아서서야 아쉬워하는 내 모습이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