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점점 시간의 흐름에 밀려 나는 어느새 의대입학 원서를 쓰고 있었고, 그 무더웠던 여름 새벽 아침 수많은 에세이들을 써 내려가던 순간들이 생생하다. 내가 왜 의사가 되어야 하고 왜 특정 메디컬 스쿨을 가야만 해야 하는지 쓰고 또 쓰고, 고치며,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근데 사실 난 오히려 점점 마음이 편해져만 갔다. 실패해도 괜찮을 수 있다는 백업 플랜을 준비해놓고 있어서 그랬을까. 아님 내심 포기를 조금 해놓은 상태여서 그랬을까. 어쩌면 이젠 도전한 뒤 실패해도 후회가 없을 거란 마음에, 그 기나긴 학부생활의 끝이 보여서였을까. 더 이상 주사위는, 내가 아닌 입학사정관들에게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그 치밀함의 생활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조금 멀리할 수 있었고, 그 찰나의 여유가 너무 감사했다.
어쩌면 기대감도 조금 생겼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의과대학은 AMCAS (American Medical College Admission Service)를 통해 공동 1차 지원서를 먼저 내는데, 이 1차 지원서를 내 어드바이저분과 마지막 검토를 하던 중, 그분이 나에게 흘리듯 말씀하셨다. "고생했다, 내가 보기엔 넌 어디가 됐건 붙을 거 같아"
과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렇게 학부 내내 나에게 부정적인 조언만 하셨던 그분이 나에게 저러한 희망의 말을 처음 건넸을 땐, 난 의구심도 들었지만, 혹시 내가 그 행운의 주인공이 되진 않을까 조금 기대해고 싶기도 했다. 난 정말 최선을 다했고, 실패에 대한 준비도 어느 정도 했었고, 그래서 난 괜찮을 거라, 스스로 다독였다. 무엇보다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했기에 오히려 홀가분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공동양식의 1차 원서를 낸 뒤 학교별로 secondary application을 제출해야 했다. 나같이 합격의 여부가 불투명한 학생들은 꽤 많은 숫자의 학교들을 지원하기 마련인지라, 내가 제출해야 하는 secondary application의 숫자는 정말 많았다. 그렇게 해서, 낮엔 생화학 실험실에서 실험하고, 그리고 밤에 돌아와선 의대 원서들을 작성하면서 나의 대학생활 마지막 여름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결국 그 끝에 모든 애플리케이션을 제출하고 나서야, 나는 조금이나마 홀가분히 한국 부모님 집으로 짧은 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초,
한국 부모님 집에서 지내던 어느 무더운 여름밤 새벽시간,
난 그렇게 나의 첫 의대입학 인터뷰 초청 이메일을 받았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시스템이 잘못 발송한 것은 아닐까? 내가 영어를 잘못 해석한 것을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어엿한 인터뷰 초대 이메일이었다. 그 새벽 잠드신 부모님을 깨워 그 기쁜 소식을 나누었고. 너무 행복했다. 비록 합격이 아닌 인터뷰 초청이었지만, 나에겐 너무 큰 희망으로 다가왔다. 결국 서류전형은 다 통과한 뒤, 이젠 인터뷰만 남았다는 생각에, 혹시 내 꿈이 현실이 될 수도 있진 않을까라는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리고 곧, 적지 않은 숫자의 의대들로부터 직접 인터뷰를 해보고 싶다는 초청 이메일들이 연이어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주립대 및 중위권 의과대학들로 시작되었지만, 어느 순간 누가 들어도 알만한 탑 스쿨까지. 점점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어느 정도 인터뷰의 숫자가 쌓였을 때, 나는 자연스레 나의 "백업 플랜"들을 뒤로 미뤄둘 수 있었다. 더 이상 백업 플랜 보단, 메인 플랜을 끝까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올인"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해 가을 나는 각지 의과대학 인터뷰들로 여기저기 숨 가쁘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면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첫 인터뷰의 긴장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어린 나이에 정장을 입고 이른바 면접을 본다는 것이 아직 나에겐 많이 낯설었던 것 같다. 특히 그 첫 인터뷰한 학교는 주립대학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다른 학교보다는 꽤 많은 학생들, 적어도 한 20-30명 정도가 한 날 인터뷰를 봤던 것 같다 (다른 학교들은 주로 10+명 정도였던 기억이다). 그런 인터뷰를 진행하는 날이면 으레 공백시간이 뜨기 마련이고, 지원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기기 마련인데. 그날따라 내 옆에 앉은 남자학생과의 대화가 인터뷰에 대한 긴장감으로만 가득 찼던 내 가슴을 쿡 찔렀다.
"넌 어디서 왔어?"
"어디 출신이야?"
"유학생이면 의대 붙기 힘들 텐데, 미국 시민권자를 잡아서 결혼해야 할걸"
그렇게 학부 3년을 숨 쉴 틈 없이 준비하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준비해서 인터뷰 당일까지 왔건만, 그 삐쩍 마른 백인 남자애가 내 옆에서 저렇게 나한테 지껄였을 땐, 그냥 욱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 애가 내 지난 3년의 고생을 얼마나, 뭘 알기에 나한테 저런 말을 쉽게 내뱉을까.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못했고), 그렇게 나의 첫 의대 인터뷰를 얼떨결에 마쳤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점점 그 횟수가 늘어갈수록, 의대 입학 인터뷰는 내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대부분 입학 사정 위원회에 소속된 의대교수들은 나의 개인적 삶과 경험에 대한 1:1 대화를 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가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경우엔 내게 질문보단 당신의 의대 자랑에 시간을 쏟아붓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학교는 3:3 패널 인터뷰를 다른 지원자 2명과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일련의 인터뷰 경험들이 나에겐 큰 추억이고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무의식간에 그려왔던 나의 꿈의 모습에 대해 조금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자연스레 주어졌다. 과연 내가 원하는 의사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의대 인터뷰어들은 그런 좀 더 구체적인 꿈과 목표를 들어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과연 난 그때만 해도 내가 어떤 의사가 되고 싶었는지 알고 있었을까? 난 꿈을 좇는 것에만 몰두했기에, 의대 입학이라는 꿈을 이룬 뒤의 도전과 목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난 무엇보다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왔었고, 그렇게 저렇게 인터뷰를 계속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 해 10월 어느 날, 난 나의 첫 번째 미국의대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내가 첫 인터뷰를 했던 그 주립의대에서 나에게 제일 처음으로 합격 통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그리고 곧 머지않아, 곧 몇몇 학교로부터 합격 통지서를 더 받을 수 있었고, 내가 결국에 다니게 되었던 모교도 12월 즈음에 나에게 합격 통지 메일을 보내주었다. 물론 몇몇 인터뷰가 더 남아있었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이젠 그 결과와 상관없이 정말 난 이제 어엿한 미국 의대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밤낮으로 그렇게 갈망하고 열망했던 미국 의대 입학의 꿈은, 정말 꿈처럼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때는 몰랐다. 이 또한 기나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