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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srkim Jun 04. 2023

의대 진학 실패를 준비하는 자세

 방어 기제와 부정성 편향에 관한 이야기

대학교 2학년 후반, 이제 나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었다. 더 이상 나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 누가 아무리 내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 의대 진학이 어렵다고 할지라도,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돌아서면 나중에 너무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3학년이 끝나면 남들처럼 미국 의대 "지원"은 해보기로 확고히 마음먹었다. 그리고 내 삶의 모든 부분은 미국 의대 입시 "도전"으로 귀결됐다. 이 당시만 해도 미국 의대 입시 시험 MCAT (Medical College Admission Test) 도 보지 않은 상황이었고, 남들이 한다는 리서치도 아직 시작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리고 군대 문제 해결 방법도 없던 정말 암흑 같던 시기였지만,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물러서는 것은 정말 평생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기에, 그것만으로도 나는 부딪혀볼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을 다잡으려고 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의 end point는 "도전"에 있었다. 내가 미국의대 진학에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실패의 확률이 무한히 더 높았기 때문에. 내 꿈은 그저 도전에 의의가 있었다고 믿었고, 성공의 가능성은 낮았지만, 그 도전만으로도 20대 초반의 나에겐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자기 위로를 했다. 말이 쉽지, 이 다짐은 매일 밤 갈팡질팡 흔들렸고, 그러나 그 누구에게 털어놓고 물어보거나 상담을 하거나, 나의 고민을 위로받을 수 있는 상황은 없었다. 그저 시간은 흘러가기만 했고, 난 최선을 다해 내 노력을 쏟아 부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의 목표를 단순히 미국 의대 진학 도전에 의미를 두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나에겐 백업 플랜의 고민들이 따라왔다. 즉, 내 도전이 실패했을 경우의 시나리오, 그 상황을 준비하는 백업 플랜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치 기계적으로 수학문제 풀듯이, 이것 저것 백업 플랜들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심신을 지치게 하는 과정이었지만, 그 당시 내 머릿속엔 내가 의대에 불합격할 확률이 너무나도 높았기에, 그 이후 내 인생의 시나리오를 조금이나마 그려 놓는 것이 필요했다.


많은 미국 대학에선 학부전공을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진급할 때 정하게 된다. 내가 듣고 있던 강의들은 많은 부분이 의대입학 요강에 맞는 pre-med과정의 수업들이었는데, 생물학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나는 생물학 전공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무언가 불안했다. 무엇보다 의대 진학을 하지 못했을 때, 취업할 수 있는 이른바 '밥벌이' 할 수 있는 전공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는 생물학 전공으로 의대진학을 하지 못할 경우, 다른 어떤 진로를 그리면서 나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고, 무언가 차선의 계획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여러 전공들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경제학을 복수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다 끝내고 보니 경제학이란 학문 자체가 취업을 도와줄 거란 나의 생각은 사실 굉장히 단순하고 짧았다. 학교에서 배웠던 경제학은 굉장히 academic 하고 analytic 했지만, 실무전선에서 뭔가 써먹을 만한 그러한 지식들의 내용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경제를 읽는 눈을 조금이나마 잡아주었다고나 할까. 지금 돌이켜보면 미국에서 학부 전공은 그렇게 큰 요소가 아닐 수도 있는데, 그 당시에는 이게 나의 백업 플랜으로서 핵심 중 하나였고, 그렇게 나는 생물학과 경제학을 복수 전공하게 되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어머니께선 내가 경제학 전공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의대를 낙방해도 갈 수 있는 길이 있겠지라며 조금 위안을 삼으셨던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안정적인 진로를 좋아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은 같은가 보다.


또, 미국 의대 진학에 실패했을 때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의료분야 전문직의 기회를 엿봐야 할까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사실 그 당시에는 한국에서 의전원제도가 막 시작되던 시기라, 주위 한국인 유학생들 사이에선 한국에서의 의전원 진학이 큰 관심이었다. 주변의 몇몇 학생들은 미국 학부 유학 중 방학이나 학기 중 시간을 이용해 한국 MEET (한국 의전원을 위한 시험)를 공부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이러한 한국으로의 복귀는 무언가 거리감이 있었다. 그 이유는 잘은 모르겠다. 어쩌면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미국에서 의사 하는 게 한국의사보다 그저 멋있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허영심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님 내가 이제 난 미국에서 공부를 하던 사람인데,  다시 한국에 가서 의대를 가면, 괜히 무언가 길을 멀리 돌아왔다는 손해 보는 장사라고 생각이 들었을까. 아님 아직 해결되지 않은 군대문제가 내 발목을 잡고, 입영 먼저 하게 될 것만 같은 그 어떤 두려움이었을까. 지금 돌이켜 보면 가보지 않은 길들에 대한 불안함과 고민이었을 뿐인데, 그때는 이러한 결정과 고민들이 너무 어려웠다.


다행인지 아닌지, 나는 한국행을 준비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3학년으로 접어들면서, 학교 공부의 강도는 점점 조여왔고, 미국 의대 진학 스펙 쌓기로, 생화학실 리서치 프로젝트도 시작했던 상황이라 틈틈이 랩에서 실험하기 바빠졌으며, 주변 대학병원과 각종 봉사활동도 하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 봐야 할 MCAT 시험에 대한 압박은 점점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바다 건너 한국의 의전원입시까지 준비하기에는 숨이 벅찼다. 그래서 한국 복귀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미국에서 치과의사로서의 길을 조금 알아보기 시작했다. 미국 치대 입시 준비과정이 의대 입시 준비과정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는데, 무엇보다 미국 치과대학은 의과대학보다 유학생에게 길이 조금 더 열려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바가 있었고, 그런 치과 의사 선생님들을 뵌 적도 있었다. 누군가는 걸어본 길이라는 생각에,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확신이 드는 길이라 생각했고, 그리하여 나는 미국의대와 치대 입시를 동시에 준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또 이를 위해서 나는 우리 대학교 근교에 있는 작은 치과 의사 선생님을 한 분을 무작정 찾아가, 정기적으로 shadowing 하기 시작했고, 틈틈이 DAT (Dental Admission Test)를 MCAT과 함께 동시에 준비했다. 내 노력을 100% 의대진학에 쏟아부어도 성공확률이 낮을까 고민하던 나는, 결국 내 스스로 의대와 치대를 동시에 준비하는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결국에 그리하여 3학년이 끝나갈 즈음에 나는 생물학/경제학 복수전공생으로 흠뻑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낮에는 수업으로 학교공부로, 저녁에는 실험실에서, 그리고 주말엔 봉사활동과 MCAT/DAT 시험 준비들로. 그 무한반복 싸이클로 내 3학년은 채워져 갔고. 내 심신은 지쳐갔지만, 그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봄학기가 끝나갈 때 즈음에 나는 비로소 MCAT도 보고, 조금 뒤 DAT도 마칠 수 있었다. 이제 곧 의대 지원을 하게 될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의대 진학을 실패할 경우에 대한 준비도 어느 정도되어 가고 있었다.

MCAT을 준비하던 흔적. 카플란에서 준 플래시카드, 내가 만든 암기장. 저 뒤엔 전자 영어 사전. 그리고 쥐어 뜯은 머리카락들


*****


2023년.


나에겐 지금까지도 고질적인 병이 있다. 어떠한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진행되지 않을 "실패"의 상황을 먼저 가정해보려 하고, 그것에 대한 이른바 "백업 플랜"을 만드는 습성. 이렇게 되면, 난 이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잘 풀리면 당연히 좋지만, 혹 그 일이 내가 원한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더라도 내가 생각해 놓은 이미 "백업 플랜"이 있기에 별로 그것에 대한 실망이나 충격이 덜 할 것이니까, 난 괜찮겠지라고 스스로에게 보호막을 쳐두는 것이다.


오늘 저녁. 아이들을 재우고 나는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일상의 대화도 있지만,  나의 진로와, 가족의 미래와, 이런저런 나의 자잘한 고민들이 입 밖으로 나왔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아내가 나에게 말한다.


"난 네가 너무 안 좋은 경우만 생각하는 거 싫어"


난 피식 웃음이 난다.


이러한 실패를 항상 가정해 보는 습성은 과연 내 DNA 안에 있는 본질적인 성향이었을까? 아님 후천적인 영향인가. 타국으로 어린 나이에 홀로 유학을 오고, 타지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꿈을 위해 돌진만 해야 했던 어린 시절 속에서 나도 모르게 스스로 만들어낸 방어 기제이지는 않을까?


얼마 전, negativity bias (부정성 편향)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의 심리는 긍정적인 사건과 생각보다 부정적인 사건과 생각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안전을 위한 본능이라는 이야기. 나는 어쩌면 내 속내에 있는 이 부정성 편향을 극도로 몰고만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 안에서 유학생으로의 삶, 외로움, 실패의 두려움은 단지 핑계였던 것일까?


20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그때 내가 원하던 모습을 많이 갖췄다고도 할 법한데. 난 지금도 내일의 미래가 불확실하게 보이고, 그래서 계획대로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되뇌며, 벌써 다른 백업 플랜을 만들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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