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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srkim May 25. 2023

그래서 군대는 어떻게 할 건데? I

"그래서 군대는 어떻게 할 건데?"


대학교 1학년을 마칠 때 즈음. 이미 나는 미국에서 의대진학이 불가능하리라는 낙담에 심신이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짓누른 또 다른 큰 고민은 바로 군대문제였다. 영주권 시민권 소유자가 아닌, 완연한 한국 국적의 남자였기에, 병역의 의무는 어쩌면 당연했지만. 미래 진로가 너무나도 불확실했기에, 군대문제는 더더욱 어려운 문제로 다가왔다.


나는 굉장히 작은 학부중심의 대학교 (libertal arts college라고 지칭되는)에서 학부생활을 했다. 대학원 과정은 없었고, 학부생만 있는 작은 학교이었는데, 전교생은 1400명 정도였던 것 같고, 그래서 한국인 유학생의 숫자는 굉장히 적었다. 즉 군대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은 전교에 2-3 명 정도, 그중에 한 명이 나. 학생의 대부분이 학교 내 캠퍼스 기숙사에서 온전히 4년의 시간을 보내는 굉장히 residential 한 분위기에, 그래서 그 안 동기들의 유대감은 굉장히 끈끈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한국에 있는 대학생들처럼, 아님 미국 내 다른 큰 종합대학의 한국유학생들처럼, 휴학을 하고 군대에 다녀온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이른바 늦깎이 복학생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 환경이었다고나 할까. 세상에서 나 혼자만 군대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것 같아, 너무 외로웠고 그리고 이런 고민이 필요 없는 다른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현실적으로 큰 문제는, 의대진학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과연 내가 2-3년을 휴학하고 병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 합리적인 계획이었냐는 질문이었다. 학부 졸업 이후 바로 의과대학을 진학하기 위해서는 학부 3학년을 마치고 지원하는 게 일반적이었기에, 대학교 3년 간의 성적과 활동 내역이 의대진학 준비를 위한 시간의 전부였다. 그렇기에 그 3년이란 짧은 시간 중간에 군대를 다녀오는 것은, 가뜩이나 불가능해 보이는 의대진학의 꿈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조바심이 났던 것이다.


그래도 어찌할런가. 건너 건너 듣는 다른 큰 대학의 한국인 유학생들은 일찌감치 한국에 있는 대학생들처럼 휴학을 하고 군대를 다녀온다는데, 나도 그래야 하나, 정말 머리가 터질 듯이 복잡했다. 정기적으로 학점과 의대 준비 과정을 검토해 주시던 내 pre-med advisor (입학당시 미국 의대 입시를 권장하지 않으셨던 그분, 결국엔 나를 가장 많이 도와주셨다)도, 내가 병역문제를 걱정하고 있다고 했을 때, 정말 나의 상황이 너무 어렵다면서, 같이 걱정하고 고민해 주셨던 기억이 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칠 때 즘, 나는 정말 많은 시나리오들을 짰다. 내가 의대에 진학할 수 있을까?? 만약에 혹시나 진짜 내가 미국의과대학을 진학할 행운이 주어진다면 병역문제를 미리 해결해야 하나? 아님 의대 중간에 해결할 수 있나? 미국의과대학과정도 한국 병무청에서 인정이 되어 군의관으로 복무할 수는 없을까? 반대로 의대를 떨어지면, 난 바로 군대로 바로 가야 할 것만 같았고, 그러면 미래의 진로도 불투명진 상황에, 다른 사람들보다 나이도 두세 살 더 먹어 늦게 입대하게 될 나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 걱정되었다.


건너 건너 나 같은 신분의 상황들을 수소문해도 그 어떤 실례의 경우를 찾을 수 없었고, 단지 몇몇 미국의사수련과정을 밟고 있던 코리안 아메리칸 선배들은 의대 입학 이후 군대를 가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수련과정의 단절이니, 병역문제를 "해결"하고 의대진학을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리고 그 "해결" 방법이란, 정말 여러 뜻이 함축되어 있는 듯했다.


그리하여 2004년- 학부 1학년 마칠 때 즈음. 나는 카투사를 지원했다. 그나마 다른 부대에 비해 공부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단 말에 혹하고, 미국문화와 그나마 접점을 유지할 수 있다는 바람으로, 내가 가장 최소한으로 손해를 보면서 학부과정 중에 군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쩜 당연하게도, 나같이 생각하고, 아님 다른 이유에서 카투사를 원하는 동년배 남자들이 당연히 많았겠지. 카투사는 토익점수 커트라인을 넘긴 뒤, 결국 추첨으로 뽑히는 과정이었고, 나는 아쉽게도 낙방했다. 이제 벌써 2학년 1학기가 지나가고 있었고, 나에겐 더 이상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었다.


지금에서 돌이켜 보면, 20대 초반 2-3년을 내 주변 동료들과 다르게, 그리고 조금 돌아서 오는 게, 그렇게 큰일 날 일은 아닌 듯싶지만, 그 당시 나에겐 세상과의 단절 그리고 낙오로 이어질까 너무 불안했었던 것 같다. 너무 우울했고, 힘들었고, 원망스러웠다. 너무 죄송스러운데, 전화너머 부모님에 원망 아닌 원망도 자꾸 하게 되고, 스스로가 비참해졌다.


왜 나 이렇게 힘들어야 할까. 이렇게 계속 되뇌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어줄 사람도 많지 않았고. 그렇게 되풀이하여 한탄한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시간만 흘렀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복잡하지?"

"그래서 군대는 어떻게 할 건데?"



*****


2009년 봄.


난 병장으로 만기 전역을 했다. 그렇게 등 위에 큰 짐이었던 병역의 문제가 해결된 순간. 완벽했다 타이밍이. 이제 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됐다.


이 모든 것이 내가 계획한 대로 실행에 옮긴 결과였을까? 전혀 아니다. 솔직히 난 그저 운이 좋았다. 정말 너무나도 운이 좋았다. 그래서 감사할 따름이다. 그 행운까지 계획하고 승부할 능력도 머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왜 그때 그 시절 나는 몰랐을까.


삶이란 게 그런 건데. 내가 노 젓는 대로만 가는 것이 아닌데. 막상 순간엔 그 인생이란 큰 강물의 흐름을 왜 보지 못하는 것일까 싶다.


이제는 너무 그리운 군생활 식구들. 전투복과 근무복을 같이 입은 모습도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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